안경점의 그레트헨
서울, 1973년 겨울 세밑은 쓸쓸했다. 제대한 지 일 년여가 돼가던 나는 명동 입구 훈목(薰沐)다방 옆에 있는 안경점을 찾았다. 안경을 사려는 것은 아니었고, 안경다리가 귀를 심하게 누르는 바람에 귀에 상처가 나서 고쳐 쓰려는 것이었다. 희끄무레한 회색 플라스틱 테 안경은 논산 수용연대에서 훈련소로 일제히 '팔려' 갈 때 그 곳에서 만들어 준 안경이었다. 흠집투성인데다 도수가 맞지 않았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적응하느라, 맞지 않는 안경에다 눈을 맞추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사격장에서는 동그란 과녁이 잘 보이지 않아 흰 표적 천에다 대충 쏴대 조교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 후 자대에 배치돼 세월을 '죽이거나 꺾는' 동안, 하염없이 국방부 괘종시계는 움직였고, 눈도 불편한대로 안경에 적응하여 제대 후에도 내처 쓰게 된 것이다. 그 때는 누구든 형편이 좋지 않았다. 길이 든 안경을 어떠한 이유에서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은 사치였다.
나는 주인아저씨가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때 웬 여자가 들어섰다. 아저씨와는 구면인 듯 인사를 나누며 익숙한 분위기였다. 여자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미모의 여자는 20대 후반은 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10대 소녀로도 여겨지는 것이 나이를 도통 가늠할 수 없는 수상스런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내가 상상하거나 보아온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녀를 대하니 그간 마음에 두어왔던 몇몇 여자들이 천박하게 느껴졌고, 그들을 사모하였던 일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여자는 용모가 청순할 뿐 아니라, 환영인 듯 착각인 듯 그녀 주위를 은은한 빛이 싸고돌아 성(聖)처녀 같았다. 비슷한 사람을 찾아보아도 마땅한 사람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 올리비아 하세, 베아트리체, 잔 다르크… 영화배우들은 아무래도 신선미가 떨어졌고, 단테의 연인은 어렸으며, 오를레앙의 처녀는 너무 강인했다. 그때 그레트헨이 떠올랐다. 그레트헨을 생각해 낸 것은 사실 늦은 감이 있었다. 복학하여 그해 2학기 때 <<파우스트>>를 배웠던 것이다.
"멈추어라 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도다!" 유명한 극시(劇詩)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대사를 마음속으로 외쳤는데 하마터면 말이 돼 나올 뻔했다. 나는 계속해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을 암송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천사들의 합창이 장엄히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옳거니, 그녀라면 내 안경처럼 볼품없고 남루한 영혼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여자에게는 친척 아저씨로 보이는 일행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안경점에 들어온 이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사려는 듯 쇼윈도 속의 안경테를 이것저것 가리키다가 꺼내 써보곤 했는데, 동행한 남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듯 얼굴을 반쯤 돌리며 포즈를 취하곤 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꼈다 벗음에 따라 얼굴이 가려졌다 드러나는 것이 역용마술(易容魔術)을 부리는 것 같았다. 스포츠형 머리에 시골 정미소 주인 타입인 초로의 사내는 손에 다이아 반지를 꼈는데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안경을 낀 채 살포시 고개를 기울인 채 꽃처럼 웃으면, 남자는 그저 "음, 음" 고개를 끄덕이거나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몸짓으로만 수용 또는 불가의 뜻을 나타냈다.
그것은 기묘한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말 못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색한 커플의 무언극은 잠시 더 계속 되었는데 음이 소거된 슬로비디오 화면을 보듯 현실감이 없고 막막했다. 마침내 그녀가 안경 하나를 집어 들었고, 남자는 흡족한 듯 웃었는데 얼핏 금니가 보였다. 주인아저씨가 수신호로 가격을 말하자 남자가 지불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안경점을 떠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문을 통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이 밀어 닥쳤다.
나는 한바탕 헛된 꿈을 꾸었거나 미(美)의 정령(精靈)에 미혹 되었던 듯하다. 주인아저씨가 안경 수리를 끝냈지만 맥이 빠져 잠시 더 머무르다 정신을 수습하며 일어섰다. 나는 무언가 알 듯 했지만 제발 내 생각이 틀렸기만을 바라며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부녀지간인 모양이죠?"
아저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안경점을 나서니 코끝이 맵싸했다. 해 질 녘 거리는 사람의 물결. 한켠에 검은 제복을 입은 구세군이 달랑달랑 종을 치고 코트 깃에 목을 파묻은 사람들은 달력을 몇 개씩 말아 쥐고 종종걸음을 쳤다. "온 세상아 주님을 찬양하라~" 레코드 가게에서 성가(聖歌)가 울려 퍼졌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지는 것이 안경에 습기가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경을 부셔져라 움켜쥐고 그레트헨을 잃은 설움에 목이 메어 찬바람 도는 명동의 뒷골목을 헤맸다. 서울, 1973년 겨울 세밑.
* <<한국수필 (2008년 12월호)>> 신인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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