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캔버스에 검붉은 노을이 물감 든 듯 번져 있다. 프랑스에서는 해가 사위어 땅거미 질 무렵을 '매직 아우어(Magic Hour)' 또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사물이 모호하고윤곽이 흐릿하여 잘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인생의 계절도 어슬녘이다. 60대 중반의 나이니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연령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며, '과일'도 아니고 '채소'도 아닌 격이라고 자조 섞인 농을 주고받기도 한다.
<황무지>로 유명한 시인 T. S. 엘리엇도 "빛도 어둠도 아닌 황혼이 인생"이라고 읊었다. 삶의 국면에는 빛이 있는가 하면 그림자도 있음을 일컬음이다. 밝음을 준비하는 동틀 녘의 희끄무레함 속에서도 어둠을 재촉하는 해 질 녘의 어슴푸레함 속에서도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본다. 누구에게나 그만그만한 사연과 내력 쯤 있을 터이지만 내 삶도 기쁨과 희망, 슬픔과 절망의 교직(交織)이었다.
삼십대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병마가 찾아 왔다. 당뇨 합병증으로 폐에 천공(穿孔)이 생겨 시도 때도 없이 각혈을 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며 버티어내는 삶은 살얼음판 걷듯 위태로웠다. 설상가상으로 내게도 이상이 생겼다. 머리가 파편처럼 깨어져나가는 통증과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시야가 흐려지는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부신(副腎) 어림에도 종양이 있었다. 게다가 혈압이 치솟았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1985년 여름 개복수술을 했다. 당시 CT촬영술을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처음 접해본 병이라 의료진도 당황했다. 부신은 허리 뒤쪽 신장 옆 깊숙한 곳에 있어서 1mm 간격으로 수십 컷을 찍어야 종양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5 컷 만에 발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할 새도 없이 인생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지쳐서인지 억울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음을 뛰어넘거나 뒤로 물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생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사의 주관자인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삶과 죽음을 당신께 맡깁니다. 삶을 정리하고 빈 마음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용서해야할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저를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
복부 깊숙이 위치한 종양을 제거하는데 예상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수술 중'이라는 빨간 불의 신호판을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식구들은 숨통이 멎는 듯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종양을 떼어내자마자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료진들로서도 처음 시도한 수술이어서 자기 일처럼 환호했다. 지금도 복부와 오른 쪽 옆구리에는 수술흔적이 보기 흉하게 나 있다. 수술 후유증으로 점점 살이 찌기 시작했고 빠질 줄 모른 채 '뚱보할머니'로 손자들에게 불리고 있다.
남들보다 곡절 많고 신산한 삶을 산 것은 아니겠지만, 부모와의 이별로 할머니 댁에 떨어져 지낸 유년시절 이래 줄곧 내 삶은 평탄치 않았던 것 같다. 삶의 시름마저 잊어버린 채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고, 10년 연상인 남편과의 결혼의 기쁨도 잠깐, 반려자의 치명적인 와병과 나에게 연이어 닥친 병마는 삶을 짓눌렀다.
그렇다고 내 삶이 병고로 인한 고단한 여정으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나 역시 적당한 크기의 만족과 비슷한 크기의 좌절 사이를 오가며 나름대로 무연히 지나간 세월도 있었다. 삼남매가 잘 자라주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들의 재롱도 할미를 기쁘게 한다. 무엇보다 다행한 일은 우리 내외가 치명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병을 그런대로 견디어내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환난 중에 기뻐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있지 않던가. 삶이 푯대 없이 흔들리거나 암초를 만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마다 알지 못할 힘이 나를 일으켜 세워 땅거미 지는 어슬녘 길을 통과해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었던 듯하다. 한 때 포기했던 삶을 되찾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잉여의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에는 절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돌이켜 보니 빛과 어둠의 교차 속에서 나뭇잎 사이로 바람 스치듯 결 따라 순리대로 살아온 삶이었기 싶기도 하다.
해는 기울었지만 숨결은 남아 있다. 사물들의 윤곽이 아스라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왠지 모르게 가슴에 물결이 인다.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오리라. 동틀 녘과 해 질 녘은 풍광이 비슷하다. 하루 중 동트기 전 어둠이 가장 짙지만 해 질 녘 어느 순간의 사물 또한 가장 선명하다. 고요와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나의 남은 삶을 다시 떠오를 여명의 밝음에 싣고 싶다. 경건함과 희망 속에서 빛도 어둠도 아닌 황혼의 아름다움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