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오빠가 없는 우리 자매들은 방학이면 부산 큰집 막내 오빠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와 나이도 비슷하고 잘 생기고 재미있는 오빠는 방학이면 이삼일은 대구 우리 집엘 다니러 왔다. 우리는 함께 따뜻한 구들 목에 발을 넣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때 오빠에게 배운 노래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타박네’ 였다.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어디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로 찾아 간다.”
엄마를 찾아 무덤가에 가는 타박네의 슬픈 노래 가사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큰엄마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지적인 분이셨다. 늘 책을 읽고 서도를 하며 영어 공부를 하는 모습이 내게는 인텔리 같아 멋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 멋진 큰엄마는 오빠에게는 계모였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불화로 친 엄마와 소식이 끊겨져 새엄마와 살았던 오빠에게 ‘타박네’의 노래 가사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타를 치며 ‘타박네’노래를 부르는 오빠의 모습이 마치 그 가사속의 아이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오빠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의 겨울, 큰아버지의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다음 날, 오빠는 부산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고 할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가기위해 대구로 왔다. 우리는 오빠를 따라 시외버스를 타고 달성군 논공면에 있는 선산으로 갔다. 할아버지의 산소는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추운 겨울날, 꽁꽁 얼어붙어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우리는 좋아서 지루한 줄도 모르고 걸어갔다. 성묘 때 가던 기억을 더듬어 드디어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절을 하고 차가운 산소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고 있는데 뉘엿뉘엿 조용히 넘어가던 해가 갑자기 뚝! 한순간에 떨어졌다. 서둘러 길을 재촉했지만 어두운 길을 아무리 가도 버스 정류장은 커녕, 사람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시골 길을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멀리 우뚝 솟은 뾰족한 두개의 산봉우리가 점점 시커멓게 변해갔다. 멀리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무서움은 절정에 달했다. 그 때 무서움을 쫓느라 부른 노래가 공교롭게도 늘 우리가 자주 부르던 ‘타박네’였다.
“타박타박 타박 네야 너 어디메 울고 가니 우리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로 찾아간다.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산이 높으면 기어가지.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물이 깊으면 헤엄치지. 명태 줄까 명태 싫다. 가지 줄까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기어 와서 보니 빛깔 곱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기에
두 손으로 따서 들고 정신없이 먹어보니 우리엄마 살아생전 내게 주던 젖 맛 일세”
춥고 어두운 시골 길에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타박네'를 부르며 걷고 있자니 어쩌면 그 가사가 춥고 배고픈 우리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던지 노랫소리는 금방 울먹이는 소리로 변했다. 그날따라 달빛은 평소보다 더 차갑고 처연해 보였다. 태연을 가장하던 오빠들 역시 무섬을 타는지 침통스런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먼 곳에서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치더니 차 한 대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처 뛰어갈 겨를도 없이 친절한 그 차는 우리 앞에 와 섰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세상에! 아버지였다. 산소에 간다고 나간 아이들이 연락이 없어서 걱정된 아버지가 직접 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던 우리에게 아버지는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환한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니 눈물과 함께 엉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둠속에서 우리의 울음소리와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가 산 속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버지는 얼른 우리를 차에 태웠고 우리는 설움에 겨워 종달새처럼 설움을 토해내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아무래도 산소를 잘못 찾아간 것 같다고 말하시며 차를 돌려 다시 산 쪽으로 향하셨다.
달빛이 휘영청 비치는 산속, 아까와는 다른 장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산소 앞에 서서 두 번 절을 하고나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버지. 큰 집 막내가 이번에 대학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모두 아버지가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아까는 우리 아이들이 산소를 잘 몰라서 다른 어른 산소에 가서 절을 한 모양입니다. 이 먼 길 할아버지 만나려고 온 아이들, 머리 한 번씩 쓰다듬어 주이소”
달빛은 눈부시게 하얀 빛으로 우리 머리 위를 비추었다. 한 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였지만 마치 그 달빛이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멀리 붓 모양을 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 봉우리를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저기 저 산봉우리가 두 개 나란히 보이지? 그 봉우리가 붓을 닮았다 해서 필모봉 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 문필가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구나. 어쩌면 너희 중에서 나올지도 모르지.”
문필가라니! 당치도 않는 이야기였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우리에게도 전설 같은 꿈이 생겼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서움과 추위에 떨던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마치 삐걱거리던 낡은 문이 기름을 발라 갑자기 부드러워진 것처럼, 새로운 기억으로 채색되었다. 그렇게 무섭던 산봉우리가 갑자기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두려움이 아름다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낡은 중고 자동차는 솜이불만큼이나 따뜻했다. 따뜻한 차에 꽉꽉 끼어 앉아 지친 몸을 싣고 앉자니 얼었던 몸이 녹아 모두가 금세 곯아떨어졌다.
“다 왔다. 자장면 먹자!”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벌써 대구시내의 중국집 앞이었다. 자장면과 군만두가 그날처럼 맛있었던 적은 없었다.
달빛 휘영청 비치는 시골 길을 걸을 때면 지금도 그날의 일이 생각난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아버지, 그 아버지가 그날처럼 크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헤쳐 가며 서럽게 불렀던 노래 ‘타박네’가 지금은 따뜻한 나의 유년의 기억으로 다시 자리 잡고 있다. (2012. 11)
-2013, 3 <책과 인생>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