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이 시대의 큰 어른 법정 스님이 입적한 지 올해로 3주기를 맞았다. 사리사욕의 유혹에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몸소 ‘무소유’를 실천함으로써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던 그 설법의 음성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법문을 통해 주옥같은 말을 남긴 스님은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로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하기도 했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무렵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그런가 하면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3년 전, 평생 목숨처럼 간직했던 ‘무소유’의 철학을 끝까지 실천해 보인 큰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엔 형형색색 만장(輓章)도, 꽃상여도 없었다. 간소한 행렬을 지켜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객들의 기도소리 만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스님이 생전에 "내가 어떻게 가는지 보라"며 가장 간소한 장례를 부탁했듯이 빈소에는 과일 하나, 떡 한 조각도 없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같은 피를 나눈 민족끼리 벌인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1954년 마침내 출가(出家)를 결심,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선사(曉峰禪師)’를 만나 대화한 뒤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훌륭한 스승 앞에서 승가에 귀의한 법정 스님은 평생 출가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산문집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會主)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2003년에는 회주 자리마저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며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에게는 가슴속에 절절히 파고드는 위로의 어루만짐으로 다가섰다.
산문인(散文人)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이런 숨은 힘은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출간된 뒤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무소유’를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해 종교는 다르지만 법정스님과의 각별한 친분을 나타내기도 했다.
스님이 펴낸 책은 한꺼번에 읽어도 좋은 책이 있는가 하면 아껴놓은 차를 타 마시듯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 특히 돋보인 것은 성직자와 신앙인을 통틀어 가장 광범위하게 읽힌 수상집과 경전번역집이다. 이처럼 생전에 모두 30여 종의 저서를 남겼는데 ‘무소유’를 비롯한 인세 총 수입은 1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다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 등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했을 뿐이다. 그것은 평소 기부내역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법정 스님의 철저한 기부철학 때문이었다.
스님은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는 유언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모든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가진 것을 모두 베풀며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법정 스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은 ‘나눔, 버림, 비움’의 세 단어를 다시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