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나 절차에 얽매여 사안의 본질이나 내용을 그르칠 때 흔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지난달 남북 당국자 간 회담(실무국장급 회담이 아닌)이 회담 대표의 격에 대한 이견으로 무산되었죠. 한 신문에서 이에 대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 박근혜 정부의 포용력 부족을 비판하는 논지였습니다. 정작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글쓴이가 논거를 보강하기 위해 차용한 칸트의 말이었습니다.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칸트가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했다는 이 말은 사실 정확한 인용이 아닙니다. 말의 순서도 뒤바뀌었고요. 원전에 따르면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입니다. 'Anschauungen'은 '직관'이라기보다 '관점'이나 '통찰'을 뜻합니다. '직관(Unmittelbare Erkenntnis)'을 뜻하는 라틴어 어원인 'Intuition'이란 단어가 따로 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국내 번역서에 '직관'이라고 쓰였고 그렇게 통용되고 있군요.
칸트의 말을 처음 귀동냥해서 들은 것이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 도움이 되겠거니 싶어 외워두려 했지만 자꾸 혼동되는 거예요. '내용(Inhalt)' '사유(Gedanken)' '개념(Begriffe)' '직관(Anschauungen)'이 자리바꿈하면서 회전목마처럼 빙빙 돌아요. '직관 없는 개념'이라고 했던가, '사유 없는 내용'이 어떻다고 했던가, 아니 거꾸로였나? 까다로운 성격 탓도 있겠지만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어떤 순서로 배열하든 그럭저럭 말이 된다는 점에 있었죠. 꾀를 내어 단어 첫글자만을 따 '내사공 개지맹'이라고 수십 차례 주문처럼 읊조리고 나자 '멘붕' 상태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칸트의 말은 '오성(Verstand)'의 작용으로 '인식(Erkenntnis)'이 성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대상은 일단 '감성(Sinnlichikeit)'을 통해 수용되지만 오성의 터널을 통과해야 참다운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대상에 대한 내용 파악(직관)이 없는 사고는 알맹이가 없고, 오성의 자율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직관) 또한 장님처럼 헛짚을 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칸트는 나아가 주장합니다. 이러저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성적 직관으로 인식되지 않는 초(超)감성계(영원불멸, 세계의 무한성, 신의 존재 같은)가 있는데 여전히 오성의 범주를 적용하려는 데서 선험적 가상이 생겨난다고.
독일 관념철학의 백두대간인 칸트는 어렵기만 합니다. '이성(Vernunft)'이니 '오성(Verstand)'이니 '지각(Sinn)'이니 '감각(Perzeption)'이니, 허 참. 이 말이 그 말 같고 그 말이 저 말 같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또 혼란스러워져 공연히 시작했다 싶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실생활에서 철학적 개념을 엄격히 구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요. 대상에 대한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표상을 뜻하는 '개념'만 해도 일상에서는 '보편적인 상식 기준', '최소한의 예의범절' 또는 '삶의 도리에 대한 당연한 이해'라는 뜻으로 통용되지 않나요? 그러니 '개념 없는'이란 한정어는 함부로 쓸 것이 아닙니다. 친구, 가족(부부 포함!) 간에도 가끔 사용되곤 하지만 말예요.
다시 '내사공 개지맹'으로 돌아옵니다. 환희밀교(歡喜密敎)의 경전에나 나올 것 같은 이 구절도 쉽게 풀이하면,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피상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도 안 되지만, 전후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신념만 고집해도 곤란하다"는 정도의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 경로로 패러디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관능(육체, 섹스)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지성(정신, 마음)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