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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일미 <평론>    
글쓴이 : 박태원    14-02-23 11:41    조회 : 5,285

시선일미 (詩禪一味)

박태원

우리의 정신문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는가

그 대간(大幹)은 단군시대의 천부경에 나타나는 일심(一心)사

상과 신선의 경지, 불교의 반야보리사상과 자비원력의 대승보살

의 경지, 유교의 시즉리(是卽理), 심즉리(心卽理)사상과 대덕성인

의 경지, 기독교의 영혼불멸의 영생사상과 성령세례를 받은 이타

(利他)적 사랑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문화의 정수(精粹)가

동이문화의 토대 위에서 흡수되고 융화되었다. 우리의 역사적 고

난이 민중의 가슴에 한(恨)을 이루었지만, 이것은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지키려는 투쟁이요 파토스(pathos)라고 생각한다.

조지훈 시인은 동서양의 문학을 섭렵하고 고향인 동양문화의

정신세계로 돌아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평생 참선을 하며 깨달음의 미학을 시에 접목 시켰다. 이는

동양의 문인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이다.

깨달음이란 공(空), 공공(空空), 자비원력(慈悲願力)의 원융무애

(圓融無涯)한 득도(得道)이다. 시즉리(是卽理)를 깨달으면 이무애

(理無碍)임을 알며, 모든 행업(行業)이 연기(緣起)의 소산인 줄

깨달으면 사무애(事無碍)인 줄 알며,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가 둘이 아님을 체득하면 이사무애인(理事無碍人)이 되어 자비

원력의 보살행을 하며,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님을 체득하면 사

사무애(事事無碍)의 대광명처에 안심입명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고도로 발전한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무명의 근본원

인은 의식과 무의식인 업식(業識)인 줄 알기에 화두의정을 통하

여 수 만겁을 쌓아온 업식을 깨트리고 대광명의 본성을 회복하

는 것이다. 반야보리를 회복할 때 머물지 않고(無住) 편견으로

왜곡되지 않는(無念)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발휘하는(無相) 자

유인이 되는 것이다. 찾고 구하는 것이 망상(業識)인 줄 알 때 깨

달음은 가까이 있다.

시인은 깨달은 자이다. 진리를 체득하면 언구(言句)에 구애되

지 않고 임의자재하게 세계와 나의 동일성을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을

굴리는 자이다. 그가 말하고 쓰는 언구는 진실무허(眞實無虛)하

며, 또한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니 말해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으

며, 말을 하지 않아도 진리를 나타낸다. 깨달음의 미학은 자유로

움에 있는 것이다. 그의 영혼은 언제나 북극성처럼 빛난다.

“… 선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그 바

탕이라 할 수 있다. 경(經)이 쓸데 없으니 앵음연어(鶯吟燕語) 가

무비설법(無比說法)이라, 고요히 앉아 원관산유색(遠觀山有色)하고

근청수무성(近廳水無聲)하는 사이에 불법을 듣는다.

- 我有一經券(아유일경권)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世尊(세존) 一日(일일) 在靈鷲(재영취) 設法于百萬大衆(설법우

백만대중) 時(시) 梵王獻金波羅華(범왕헌금바라화) 世尊(세존)

衆前(중전) 拈花瞬目時(염화순목시) 大衆(대중) 不會其意(불회

기의) 摩詞迦葉(마하가섭) 在坐中(재좌중) 而破顔微笑(이파안미

소).

상대적인 언어로 절대의 경지의 편린(片鱗)을 보일 수가 있다.

어쩌면 더 효과적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의 근로와 고충과 천분이

여기서 발휘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시적 감흥이나,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시적 감흥이다. 하늘로 피어 오르는 수증기가

이슬로 내려온다. 여기서 시와 선이 잠시 자리를 달리한다. 그러

나 선(禪)도 마침내 대자연의 구극을 체득하고 다시 상대의 세계

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 그것이 곧 절대의 세계니까…

이심전심이라 하나 어찌 이것을 알 수 있느뇨. 선과 시가 다 마

음을 깨끗이 닦는 수련이 요청된다. 공부가 필요하다. 선종(禪

宗)은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그 방법론의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시(詩)도 돈오점수해야 하리라. 시가 무엇인가를 체득한 뒤에 비

로소 수련해야 한다. 점수돈오의 문이 시의 나라에 없는 것은 아

니나 먼저 시가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

남의 시를 읽고 모방하고 지어 보고 하는 동안에 자기를 발견하

는 것은 점수돈오(漸修頓悟)요, 가만히 앉아 남의 세계에 냉정히

소요(逍遙)하고 문득 자신의 시의 방향과 위치를 깨달은 뒤 붓을

드는 것은 돈오점수다. 가는 길이 다를지언정 그 결과야 어찌 다

르리요마는 돈오점수에는 자기류(自己流)의 형식과 기교의 완성

이 빠르다.

“범독아시자(凡讀我詩者) 심중수호정(心中須護淨)”이라고 한산자

(寒山子)는 말했거니와, 시를 읽는 자 마음을 닦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시를 쓰는 자야 말해 무엇하리요.

無限野雲風捲盡(무한야운풍권진) 輪孤月照天心(일륜고월조천심)

(번뇌의 구름이 다한 뒤에야, 외로운 둥근달이 천심을 비추네)

쇳덩어리 하나 들어올리는 데도 도가 있다. 어찌 시에 도가 없

으리요. 종교와 도덕과 철학을 초월한 그러나 그것까지도 포함한

미(美)의 도(道). 시가 선(禪)처럼 그 구극(究極)의 자리에 선다.

내 아직 선의 도리를 알 것 못 되나 무애(無碍)한 경지에서 이도

선의 일면(一面) 아님이 아니라 붓을 놓으며 미소한다.”

━ 조지훈, <문장> 1940년 11월호

선문시답(禪問詩答)

……

승(僧) : 어디가 그대의 고향인가

나 : 구름 좋고 달 밝은 곳 서역만리길.

(註 : 그곳에는 구름<번뇌>과 달<반야보리>이 어울려 아름답다)

승: 구름 흩어지고 달조차 떨어지면 어디가 그대의 집인가

나 : 돌아가는 길은 돌아오는 길, 달뜨기 전 강마을에 노을이 핀

다.

(註 : 여래여거<如來如去> 산 너머 연기 나는 곳 - 담장에

뿔이 보이면 소인 줄 안다.)

시문선답(詩問禪答)

……

승(僧) : 시는 무엇 때문에 씁니까

나 : “飯來開口(반래개구) 睡來合眼(수래합안)”

(註 : 시작<詩作>은 무위행<無爲行>이다.)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 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芝容)

승 : 시가 깃들이는 마음자리는 어딘가요

나 : “遠觀山有色(원관산유색) 近廳水無聲(근청수무성)”

(註 : 색이 없는 곳에서 색을 보며, 색이 있는 곳에서 색을 보지

않는다. 空卽是色 色卽是空)

알겠느냐고 물어도 답이 없기에 다시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의 구를 읊다.

(註 : 도연명의 시 "飮酒"에 나오는 구절이다.)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자연히 구석지다하네.

<註 : 한생각 일으키지 않아 경계에 무심해 졌는데>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다가,

<註: 우연히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천천히 남산을 바라본다네.

<註 : 홀연히 나의 참성품을 깨달았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 기운 해질 녘 아름답고,

<註 : 모든 것이 죽을 때 오히려 크게 사느니>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날아가는 새들은 서로 더불어 돌아가누나.

<註 : 너와 나 둘이 아니어라>)

승 : 시는 어디 있는가요

나: “天高海闊(천고해활) 鳥島絶人?조도절인종)”

(註 : 인간의 자취가 끊긴 곳이라 하나,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청산이 따로 있던가 비 맞아 숨 살면 청산되는 것을”(巴人)

승 : 시에는 여러가지 유파가 있는 모양인데 왜 그런가요

나 :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彼亦一是非(피역일시비) 此亦一

是非(차역일시비)”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라도 절로 절

로”

(註 : 本來無一物이라 하여도 때가 묻었으니, 本來亦是非 是非

亦本來이다)

승 : 어떤 시가 오래 읽히나요

나 : “畢竟逍遙離有無(필경소요이유무)

(註 : 有無를 벗어난 곳에서 노닌다. 本來處이다.)

“나의 무덤에는 그 차가운 비(碑)석돌을 세우지 말라”(亨洙)

승 : 시와 선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 : 毫釐之差(호리지차) 千里之繆(천리지무)

(註: 시와 선은 다르지 않다.)

승 : 그러면 시는 도시(都是) 무엇인가요

나 : 뭐가 시 아닌가요. 시가 곧 시지요.

대답이 끝나자 젊은 중은 합장하고 일어서고 산골에는 낮 종소

리가 맑고 무겁게 울려오는 것이었다.”

━ 조지훈, 「또 하나의 시론」 중에서

어디가 그대의 고향인가요

- 일원상(一圓相)

어디가 그대의 집인가요

- 북극성을 등불 삼아

달을 베고 누었으니

왼발은 은하수에 걸치고

오른발은 태양을 굴린다.

시가 깃들이는 마음자리는 어딘가요

-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곳이다.

시는 어디 있는가요

-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시를 노래한다.

조지훈시인은 여래선은 알았으나 조사선은 꿈에도 몰랐구나.

글에 흔적이 남았으니 대나무 그림자로 쓸어낸다. 시인은 의식

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시인의 글에는 활구(活句)가 살아 생동

한다. 참시인은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 눈을 깜박이고 보

고 듣는 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다.

詩畵一律論(시화일률론)을 주장한 소식(동파)은 외형적인 묘

사인 형사(形似)와 대상에 대한 작가적 영감 작용에 의한 본질

속성인 신사(神似)를 논하고 시와 그림은 그 법도가 천공(天工)

과 청신(淸新)이라고 말한다. 그는 “적벽부”에서 밝은 안목을 보

였다.

소자 말하되 "손님께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손님이 기뻐서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고기와 과일 안주

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배 안에서 서로 함께 포개어

잠이 드니,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네.

━ 소동파, 시「적벽부」 중에서

물과 달을 아시오

여래여거(如來如去) 부증불감(不增不減)

내 마음과 같아라

세상 사람은 소유하기를 바라나

마음은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가 내려 준 보물이어라

나와 그대가 술잔을 비우며 밤새도록 누리세

왕유의 시 “송별”에도 그의 안목이 보인다.

말에서 내려 술 따르면서

”어디로 가시려나” 그대에게 물었네.

그대는 말뜻을 알지 못하고

”종남산 기슭에 돌아가 살려 하네,”

그대여, 더 이상 묻지 않으려니 가시게

흰구름 벗 삼아 영원히 함께 하시게.

━ 왕유, 시「송별」 전문

어디로 가시려나

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가는 곳도 이와 같다네

종남산 기슭에서 흰구름 벗 삼아 술 한 잔 먹세그려

황금찬 시인도 시 “그의 간 곳은” 에서 여래여거(如來如去)의

진리를 노래한다.

테크노마트엔

바람이 불고 썰물이 멎지 않는다.

3층으로 오르는

네 번째 계단에 한 노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다.

남루한 복색이다.

아침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한다.

점포 주인의 말이다.

바람으로 들었다가

구름처럼 지나간다.

왜 거기 앉아있는가

내가 물었다.

갈 곳이 없어요.

어디서 왔는데

그걸 알면 내가 찾아 가겠소.

가족이 없습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노인에겐 눈도 주지 않고

파도처럼 지나들 간다.

해가 진 후 두 시간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찾아 갔으나

노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노인이 간 곳을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아는 사람이 없다.

그가 간 곳을

알고 싶다.

허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노인이 간 곳을 일러 달라.

━ 황금찬, 시「그의 간 곳은」 전문

노인이 되면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아는 이 없네

본래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한다네

3층은 삼계, 지옥. 인간. 천상, 과거. 현재. 미래, 욕계. 색계. 무색

계를 의미하며, 네 번째 계단은 삼계를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바람처럼 머물다가 구름처럼 인연이 다하면 머

문 바 없이 가는 것이 인생이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웃을까

어디서 왔는가? 본래의 자아는 무엇인가? 해가 진 후 두 시

간 … 둘이면 자아를 보지 못한다. 노인은 그 자리에 없다. 어디로

갔는가? 몰라. 숭산 스님은 말한다. 모를 뿐! 의식과 무의식을 초

월한 곳에서 참나와 합일하게 된다. 아무도 모른다. 깨달은 자는

말한다. “나는 알지 못할 줄 안다.” 라고.

인간의 생각은 거침없이 변화해서 시공을 초월하는 속성이 있

다, 그런데 깊은 사유에 몰두하여 생각이 끊어져 고요하고 성성

해지면 다시는 바깥일과는 상관하지 않으면서, 천지를 잡아당기

고 고금을 뒤섞어 놓게 된다.

진(晉)나라의 육기(陸機, 261-303)는 <문부(文賦)>에서,”시작

(詩作)할 때에는 모두 시선을 거두고 청각도 돌이켜서 고요히 생

각에 잠겨 두루 구하게 된다. 정교함은 팔극(아주 먼 곳)을 내달

리고, 마음은 만인(인은 7척, 아주 높은 곳)에서 노닌다 …고금도

짧은 순간에 살피고, 사해도 일순간에 어루만진다 …천지가 넓다

한 들 몸(문장)속에 이를 가두었고, 수많은 물건이라고 해도 붓끝

으로 만물을 꺾어버렸다…. 만 리를 넓힌다 해도 막힘이 없으며,

억년의 세월을 관통해서 건널 수 있는 진리의 나루터가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신사(神似)의 사유이며 상상력의 진수이다.

유협은 <문심조룡>에서 “고요히 명상 속에 잠기면 생각은 천

년에 닿아있고(寂然凝慮 思接千載) 근심스럽게 얼굴을 움직이

면 시각은 만리를 꿰뚫는다. (?焉動容 視通萬里)…이것이 바로

생각의 이치가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생각의 이치는 미

묘해서 정신은 사물들과 어울려 놀게 된다. 정신은 마음 속에 머

물러 있어서 사람의 의지와 기질을 다스리는 관건이 된다.

사물은 눈과 귀를 통해 마음에 이르는데, 언사와 말투가 이를

주관하는 중추가 된다. 중추가 바야흐로 통하게 되면 사물은 모양

을 감출 수 없게 되고, 그 관건이 막히게 되면 정신은 흩어져 숨어

버린다. … 이것이 바로 문장을 다스리는 첫 번째 기술이고, 작품을

계획하는 커다란 단서인 것이다.”하여 신사(神似.神思)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소자현(蘇子顯)은 <남제서(南齊書). 문학전론(文學傳論)>에서

“글을 쓰는 방법은 일(事)은 신사(神思)에서 나오고, 감정은 무

상(無象)을 불러들여 변화가 다함 없는 데 있다.”하여 예술적 상

상력을 요약하여 말하였다.

신사는 신여물회(神與物會)의 경지이며, 물아일여(物我一如)

의 묘오(妙悟)의 흥취(興趣)이며, 시의 인위적인 수식이나 논리

를 벗어난 경지이다. “한 자도 쓰지 않고, 멋을 다 표현했다. (不

着一字 盡得風流)” (사공도; 詩品)라고 할 수 있는 격외지미(格外

之味)의 시선일치(詩禪一致)된 경지인 것이다.

간화선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의단이 독로하면 크게 깨닫게 되

는데, 要는 크게 죽어 크게 사는 것이다. 이것은 경이와 같고 정

신적인 혁명과 같은 것이다. 깨달은 후에 보임을 하게 되는데 경

전을 굴리고 제호를 짜 내는 것이다. 시작(詩作)도 마찬가지여서

시가 무엇인지 깨닫고 나면 언어와 문장을 탁마하고 세상의 선

악, 시비를 가려볼 줄 아는 통찰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신석초 시인은 시 “금사자(金獅子)”에서 고려시대의 선불교를

찬탄한다.

금사자야

금빛 바람이 인다.

해바라기가 피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너의 황금 갈기

휘황한 너의 허리.

주홍색 아가리를

딱딱 벌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동굴 같은

눈을 하고

맹수 중에

왕 중 왕.

꽃 펴 만발한

싸리 밭에

불붙은 태양의 먹이

네 발로 움켜잡고

망나니로 뒹군다

땅 위에.

고려 천년

화사한 날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금빛 노을이 뜬다.

━ 신석초, 시「금사자(金獅子)」 전문

금사자가 태양을 물고 우주를 벗어난다.

불이문(不二門)을 태워 버린 동굴 같은 아가리

나는 왕 중의 왕이요, 꽃 중의 꽃이라네.

태양은 금사자를 먹고 금사자는 태양을 먹는다.

고려 천 년의 빛나던 선불교가 금빛 노을처럼 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선불교의 골수를 체득하기는 힘드나니 수 겁을 몸을 바꿔 태어나 수행하는 이 지금도 많아라.

전 온 시인은 시 “풍선놀이”에서 시인의 소망을 노래한다.

하늘을 날고 싶어

바람을 잡고 싶어

풍선을 분다.

찬란한 태양을 닮고 싶어 크게 분다.

밤하늘 달과 함께 별을 헤고 싶어

더욱 크게 분다.

빨강 파랑 노랑 분홍

아름다운 색으로 꿈을 그리고

볼이 터지도록 풍선을 불면

어느새

소망은 욕망으로

부풀고

분신(分身)이 되어

높이, 높이 하늘을 날고

욕망이 오른다.

위선이 오른다.

풍선이 나를 끌고

하늘을 오른다.

━ 전 온, 시「풍선놀이」 전문

갖가지 생각과 소망은 풍선같이 커져만 간다.

갈구하는 망상은 욕심이 되어 나를 잃고 커져만 가네

오색으로 색칠한 위선이 되어 바람에 실려간다.

현실의 질곡은 터뜨리기엔 너무 질기다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삶에는 괴리(乖離)가 존재

한다. 작가는 창조적인 형식을 통해서 현실 세계를 반영하고 내

용과 조화된 일치를 모색하여 세계와 내가 분리된 소외를 극복

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물화되고 수단화 되어버린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의미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을 영위하고 있다.

교환가치가 지배적인 경박한 인간관계를 문학을 통해서 순수한

인간관계로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현실이란 모든 부분이 움직이며 모순을 일으키는 변

증법적 전체라고 주장한다. 현실은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산문적 역사상황이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존재와 당위가 분열

되는 현실의 이원성을 의미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

상황에서 ‘시적 전체성’을 획득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예술의 본

질이 근본적으로 감성적인 에로틱한 요소에 있다고 보았다.

예술이 지향하는 순수한 동경과 정신적 총체성의 실현은 세속

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금욕적이고 순수한 지적, 감각

적 직관에 의해서 에로스를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정신의 순수성과 존엄성을 구제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 속에서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선에서 말하는

전살전활(全殺全活)이 아닐 수 없다. 감정적 의식적인 죽음과

정신세계의 부정을 통해서 변증법적인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죽으면

새로이 순수한 자비심이 심중에서 발현된다. 예술세계의 에

로스적인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최선민 시인은 시 “웃음소리”에서 황량한 사막 같은 세상을 비

웃는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다 어디 가고 자식들만 남아서

모두가 어머니 어디 계시냐고 창백한가

훌쩍훌쩍 늙도록 남아버린 자식들뿐인가

엉뚱한 곳이 줄 알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헛수곤 줄 알면서 닥치는 대로 열어보고 헛기침한다

지치지 않으려고 밥 먹고, 술 먹고

자꾸만 흐려져 찬물에 목욕하고, 화장하고

엇나갈까 염려하며 한 곳에 몇 년씩 서 있고

머물기 구실 삼아 보리밭 가꾸고

집 짓고, 트럭 만들고

이러면 얼른 눈에 띌 거라며 찾아 입는 날마다 다른 옷

나 여기 있다며 앞에만 서 있으려 자리 다투며 싸우고

왜 훼방이냐며 떠밀다가 욕 퍼붓고

모두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자기만 혼자 남는다

나타날 만한 곳곳에서 확신에 차 혼자 외롭게 늙는다

어머니가 기억할 것만 같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잔뜩 들고

남들뿐인 마을에서 자란 핏덩이 아닌 커진 살덩이를

악착같이 지켜내느라 진땀으로 범벅 된다

몇 십 년이나 줄곧 구경해 온 내게도 아련한 여자

있긴 있었던 잘 한다며 웃는 얼굴

가만 둬 보는 없는 듯한 거동, 아프다는 눈

조금만 참으라는 내밀지 않는 손

거실로 바뀐 냉정한 가슴

들리지 않는 말에 조심스러워서

돌아보면 내 몸뿐이던 어디로 나의 동행이

갑자기 끊어지고, 숨소리도 못 들을

무엇이 임박했는지 뒤숭숭한 요사이이지만

모두가 틀림없이 그러고들 있어서 굳이 귀뜸할 말이 없다

━ 최선민, 「웃음소리」 전문

사람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사방에 사물뿐이네

어머니의 사랑을 기다리는 고아 아닌 고아들의 마을

사랑의 손 내밀 줄 모르는 텅 빈 거실 같은 가슴이여

환청이 되어 들리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

친구여, 나의 친구는 나뿐인가. 온기조차 없는

고독의 원인은 나와 세상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사람

은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아의 전

체성을 추구하는 자이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랑을 베푸

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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