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사먹은 고기가 맛있었던지 딸아이가 그 이름도 요상한 ‘가브리살’을 사오란다. 정육점에 갔더니 특수부위는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니라며 기다리라고 한다. 식당에는 언제나 넘쳐나는데 그렇다면 식당 것은 가짜일까?
성형미인에 이어 ‘성형갈비’도 등장했으니 이제 성형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하는데 반해 우공(牛公)은 죽어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수술용 실을 쓰지만 우공은 식용접착제를 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식적인 명칭만 없을 뿐 그네들의 성형도 역사가 깊은데 특히 집중적으로 하는 부위는 바로 ‘갈비’이니 살 없는 갈비에 다른 소의 다른 부위를 이식한다는 것이다. 국내산 뼈에 미국, 캐나다, 독일 출신의 목살이나 앞다리 살을 갖다 붙이는데 특히 목살은 포가 잘 떠져 모양이 제대로 나온단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그 이름도 거창한 ‘다국적 성형 갈비’이다. 소의 갈비뼈 13개 중 그나마 먹을 정도의 살이 붙어있는 것은 ‘진갈비’라 불리는 6,7,8번뿐이라니 성형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비쩍 마른 사람을 가리켜 갈비씨라 부르고, 먹기도 버리기도 애매할 때 계륵(鷄肋)이라 지칭하듯 갈비란 원래 살이 귀한 부위가 아닌가?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은근히 살집이 넉넉한 갈비를 ‘욕망’하고 있으니 그러한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소는 죽어서도 성형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우리는 가짜 갈비구이를 먹으며 기꺼이 속아주고 있다. 성형갈비를 ‘목살갈비’란 이름으로 떳떳하게 파는 업체도 있으니 오히려 그 정직함이 고마울 뿐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숨쉬기 운동밖에 안하는 자기들보다도 근육이나 가슴이 빈약하다면서 운동에 대한 나의 20년 성실성을 의심하는 이도 있다. 그녀들이 보기에 20년 치곤 내 ‘하드웨어’가 시원찮은지 모르지만 그 흔한 단백질 보조제나 닭 가슴살 한번 작정하고 먹어본 적이 없으니 이만하면 양호한 편 아닌가?
장밋빛 환상 속에서라면 잘록한 개미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동시에 떠올리겠지만 허리와 가슴은 공동체 운명이라는 것을 난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슴이 풍만하면 허리 역시 풍만하고 허리가 가늘면 가슴 역시 가늘 수밖에 없는 것은 엄연한 원칙이다. 가슴은 근육이 아니라 지방이기 때문에 뱃살이 빠지면 가슴살도 함께 빠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친구들도 그럴진대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늑대 같은 남자들은 고기 붙은 갈비처럼 가슴 큰 쭉쭉빵빵녀들을 ‘욕망’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그녀들은 신이 내린 단 1%의 명품몸매 아니면 99% 성형녀들이 틀림없다. 욕망에 부응하는 성형수술 덕분에 환상은 어느덧 ‘진짜’가 되어버렸고 ‘공동체 운명’의 진실을 고수하는 여성들은 오히려 무능하게 비춰지는 신세가 되었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란 저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 과잉의 성과주의 사회를 ‘피로사회’라 지칭했다. 또한 긍정성의 과잉은 긍정을 강요하는 ‘폭력’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으며 넘쳐나는 긍정은 산만한 ‘멀티태스킹’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하였으니, 온갖 괴이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해내야 한다며 긍정을 강요하는 난해한 현대미술이야말로 ‘폭력’의 1인자가 아닐까?
먹음직스런 갈비도, 쭉쭉빵빵녀도 허구의 신화일 뿐이다. 허구와 환상을 진실이라 믿으면서 우리는 점점 피로해진다. 오늘의 부모들은 이상적 부모라는 신화에 갇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녀들은 엄친딸, 엄친아 신화에 눌려 시달리며 노인들은 무병장수 신화에 압도되어 힘들어한다. 그러니 모두들 아프다고, ‘힐링’해야 한다고 아우성들이다. 이렇듯 우리가 힘든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도 짐승도 참으로 고달픈 세상이다.
<<수수문학>> 2013 제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