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정진희
손목뼈에 금이 가 한 달 넘게 석고붕대를 하고 나니 손가락이 굳었다. “이러다간 평생 주먹을 못 쥐어요.” 의사가 으름장을 놓는다. 물리치료와 운동을 한지 석 달째인데도 여전히 주먹은 쥘 수가 없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다. 뼈는 천천히 붙어도 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손을 못 쥐면 영영 주먹을 쥘 수 없다고 한다. 잠시라도 손을 펴고 있으면 편대로, 쥐고 있으면 쥔대로 굳어져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마디와 근육이 아프다.
손가락 접기와 펴기 운동을 하다가 안 다친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봤다. 날렵하고 가뿐히 손바닥에 손가락 끝이 파묻히도록 쥐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뭘 했을까를 생각하니 기억나는 것이 가위바위보 놀이 밖에 없다. 더구나 왼손으로 한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설령 왼손이 완전히 안 쥐어진대도 뭐가 대수이랴. 아니, 약간의 장애로 평생 엄살을 떨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꾀마저 든다. 그뿐이랴. 옛 성인은 몸에 병 없기를 원하지 말라며 그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했다. 몸의 불편으로 늘 조심할 수도 있으며 또 그 불편으로 마음의 불편을 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일석이조의 효과이다.
‘주먹’이란 손의 모양 말고도 폭력이나 폭력배를 지칭하며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먹이 세다’든가 ‘주먹패’라고 쓰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주먹이라는 단어를 불러보면 심장이 잠시 멈춘 듯 먹먹한 통증이 느껴지고, 계곡에서 바윗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내 몸 어딘가 그 바위에 쓸린 듯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에 분노한 누군가의 절규나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때늦은 후회가 새겨져 있을 것 같은 주먹. 단단한 듯 보이나 열어보면 어린애처럼 연약하고 텅 빈 들판처럼 비어있는, 때론 참혹하고 때론 서글픈, 삶의 쓸쓸한 뒷모습 같은 주먹을 바라본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주먹은 작은 오빠의 주먹이다. 집안의 가장인 큰 오빠를 대학에 보내느라 작은 오빠는 낮엔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효자였던 그가 어느 날 엄마와 다툼 끝에 울면서 주먹으로 벽을 쳤다. 누렇게 바래고 들뜬 벽지 속에서 흙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 살이었던 나는 오빠의 주먹보다 벽이 부서질까봐 더 무서웠다. 오빠의 빨간 주먹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감동의 주먹은 내 아기의 주먹이다. 금방 세상에 나온 아기는 주먹을 꼬옥 쥐고 있었다. 세상과 맞장이라도 뜨려는 것인지, 움켜쥔 주먹은 경이였다. 손가락을 한 개씩 펴보니 그 속엔 거미줄 같은 운명이 들어있었다. 하늘의 비밀이 세세하게 기록된 흔적을 따라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던 손금. 천기누설이라도 한 듯 꽃잎처럼 화르륵 닫혀버리던 아기의 주먹을 보며 놀라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누구나 이렇게 덤빌 듯 주먹 불끈 쥐고 생을 시작하지만 떠날 땐 누구나 펴고 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옛날 어느 부잣집 양반은 자신이 죽으면 상여의 양 쪽으로 구멍을 내어 자신이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 양반의 상여 양 쪽으로 손 두 개가 나와 있다. 하늘을 향해 펴져있는 손은 빈손이다. 공수래공수거.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는 것이다. 손으로 움켜쥔 것은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오마르 워싱턴은 「나는 배웠다」라는 시에서 인생이란 무엇을 쥐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먹으로 생각이 옮겨간다. 주먹은 펴기 위해 있는 것 아닐까. 주먹은 불통이고 주먹을 펴는 것은 소통이다. 주먹으로는 화해의 손길도 내밀 수 없고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두드려 줄 수도 없다. 아픈 이의 이마에 손을 얹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 것도 주먹을 펴야만 할 수 있다.
팔 끝에 달린 것만 주먹이 아니다. 마음에도 주먹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움켜쥐는 것은 마음의 주먹이다. 손의 주먹은 펴고 마음의 주먹을 쥐고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의 주먹이 굳어 있는 동안 내 마음의 주먹도 굳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그리고 세상과 당신을 향한 내 몸의 전초기지인 주먹이 언제나 유연하게 펴질 수 있도록 굳어진 손가락의 뼈와 뼈 사이를 오늘도 열심히 문지른다. 뼈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