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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글쓴이 : 김창식    14-04-04 12:03    조회 : 7,387
                                           안개 
 
 안개는 불온하다. 희뿌연 장막을 헤치며 앞으로 나선다. 견고해 보이던 바리케이드는 허물어지고 순순히 길을 내준다. 그러나 막상 목표로 한 지점에 다다르면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등진 채 침묵하는 사물은 가라앉고 모호함은 또 저만치 앞서 있다. 안개 속에 들어서면 누구든 술래가 된다. 술래는 눈여겨 보아야할 곳을 지나치거나 엉뚱한 곳을 헤집다가 역할을 포기한다. ‘못 찾겠다 꾀꼬리!’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헤세의 시() <안개 속>을 학창시절 즐겨 외우곤 했다. 시간과 함께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 유랑, 파토스, 적막과 체념의 정조에 한동안 심취했다. 언제부터인가 안개는 낭만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거나 사유와 성찰의 단초를 전해준다기보다 마음을 짓누르는 요인이 됐다. 안개를 보며 부정적인 심상을 떠올리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 금기시하는 변화는 졸업 후 시작한 회사 업무와 관련이 있는 성싶다.
?
 항공사에 입사 후 줄곧 공항에 근무했는데, 날씨를 가늠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항공기 운항에 영향을 미치는 안개는 임박한 현실이고 헤쳐 나가야 할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자연 현상인지라 그저 기다릴 뿐이니 무력감을 안겨 준다. 회사를 그만둔 지 오래지만 습관은 남아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를 점검하곤 한다. 안개가 끼어 있는 날은 마음이 갈 곳을 잃는다. 날개 꺾인 비행기들의 거친 신음소리가 들리고 공항의 혼잡과 수선스러움이 입체화면으로 펼쳐진다.
 
 1984년은 서울-프랑크푸르트 노선이 개설된 해였다. 그해 우리 국적 항공사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지점에 근무했다. 그날은 항공기가 서울로 출발하는 목요일이었다. 새벽녘 작센하우젠(시내 주거지역)에 있는 집을 나서는데 안개가 찬피동물의 혀처럼 섬뜩한 기운을 품고 몸에 감겨왔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주섬주섬 차를 운전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안개는 항공기 운항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폭우, 폭설, 강풍도 영향을 주지만 안개에 비할 바 아니다.
 
 안개는 항공 종사자에게는 꿈같은 현실이자 악몽 그 자체다. 목적지 공항에 안개가 심하면 항공기는 대체공항으로 다이버트(Divert?避港)한다. 연고 없는 낯선 공항으로 피난 가는 것이니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출발지 공항도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항공편이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하면 승객들을 라운지에 쉬게 하고 SOP(현장매뉴얼)에 따라 식?음료를 제공한다. 승객의 불평?불만을 다독이고 양해를 구하는 한편, 비행기 정비 상태도 살피고, 화물 탑재작업도 점검하며, ATC(관제소)와 운항가능여부를 실시간으로 체크한다. 기장과 객실승무원은 호텔을 수배해 휴식을 취하도록 주선한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 여기저기 고함과 노성이 오가며 벌집을 터뜨린 듯 공항이 북새통으로 변한다. '공항''공황'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항의 구석과 요로는 안개가 장악했다. 일단 탑승수속은 진행해야 한다. 준비해놓고 상황을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그런 면이 있지만, 운항가능 여부는 마지막 순간에 결정된다. 라운지 너머 주기장(駐機場)에는 비행기 동체들이 뒤엉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변화에 적응치 못하고 슬픈 운명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공룡 떼처럼 보였다. 초조한 시간이 흐르던 중 다행히 항공기 출발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어 탑승을 재촉하는 아나운스멘트가 흘러 나왔다. “Achtung Bitte, meine Damen und Herren!(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립니다)”
 
 홍역 치르듯 잔무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비행기가 출발한지 몇 시간이 지났다.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이곳 공항은 안개에 젖어 웅크리고 있지만 내가 떠나보낸 비행기는 지금쯤 어느 먼 곳, 낯설고 맑은 하늘을 꿈꾸듯 날고 있을 것이다. 기내에는 따뜻한 조명이 켜지고, 회사의 로고송인 아니타 커 싱어스의 화음이 비단실처럼 낮게 깔리리라. “Welcome to my world~ Steppin’ to my heart~(내 세계로 들어오세요,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줘요)” 
 
 이 시각 나와 비행기는 다른 곳에 떨어져 있지만, 시간과 공간은 원래 한 묶음으로 교호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간 속에 공간이 있고 시간의 테두리는 공간이 결정한다.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떠나간 비행기의 항적(航跡)과 남은 자의 좌표를 가늠해보았다. 열린 하늘을 떠가는 비행기와 닫힌 공항의 사무실에 묶인 나. 공항의 훤소(喧騷)와 혼잡, 항공기 운항현황판이 내 삶의 지근거리, 아니 중심에 있었다. 한 가닥 아픔이 가시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꿈꾸고 바라마지 않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나도 악천후로 인해 길 잃은 항공기처럼 엉뚱한 곳으로 비껴난 것이 아닐까.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잠시 머무르려 한 곳에 오래 눌러 있게도 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집에서 신문을 뒤적이다 우연히 광고를 보았다. '세계를 그대 품 안에!' 큰 비행기가 세계지도 위로 비스듬히 날아오르는 회사의 구인광고였다. 그러자 조급해졌다. 집안 형편 상 당장 취직을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오래 머물렀다. 1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잠시 머무르려 한 곳에서라면 더욱
 
 졸업 후 학문의 끈을 놓아버린 회한이 축축한 안개의 토사물처럼 남았지만 딱히 내 처지를 비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겐 각자의 삶과 길이 있는 것이니까.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학문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진리를 탐구하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탑을 쌓거나 물장구치며 노는 것이 아니라 부표(浮標)를 지나 해무(海霧) 자욱하고 물길 사나운 먼 바다로 혼자 헤엄쳐나가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선취(先取)하였으니, 갈림길에서 편리함과 안일함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였다. 나는 결국 용기로부터 피항(避港)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애써 외면해온 체증의 실체였다
 
 그 무렵 회사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내게 시대정신의 파악, 인간성에의 기여, 자신에의 도달, 절대자에게 나아가는 일 같은 거대담론이나 형이상학적인 화두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게 중요했던가? 일용할 양식의 조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과 회사에서의 경력추구, 항공기의 차질 없는 운항, 또 그밖에?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 비행장 풍경이 밝아왔다. 안개가 걷히려는지 물탱크가 어둠속에서 떠오르고 희고 푸른 풍향 깃발이 바람을 받아 펄럭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드리운 안개는 짙어져 갔다.
 *<<창작산맥>>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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