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인적이 끊긴 거리에 크고 작은 건물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엎뎌 있다. 가로수 나뭇잎들이 비밀스럽게 서걱댄다.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처마 밑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숨고 어디선가 억눌린 개 울음소리 들려온다. 아파트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위가 어둡고 고즈넉하여 낯선 세상으로 통하는 경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몇 걸음 빗긴 하늘에 신호등 불빛이 깜빡인다. 두 개의 신호등은 삼각형 위험표지판을 가운데 두고 잇대어 있다. 차량용 신호등이지만 건널목에 보행자용 신호등이 없으니 주민이나 오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낮 시간대라면 3개의 신호가 작동하겠지만 늦은 밤이어서인지 노랑 불빛만이 좌우로 명멸한다.
강화유리와 투박한 쇠붙이 재질로 만들어진 신호등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일깨운다. 가상세계, 3D 입체화면, 광대역 LTE-A 스마트폰 같은 감각과 형상, 첨단기술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신호등과 함께 한때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나 효용을 잃고 잊혀져가는 다른 것들을 떠올린다. 성냥, 10원짜리 동전, 책받침과 몽당연필, 크레용과 크레파스, 우체통과 공중전화부스…. 정보통신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요즘 추세라면 빈 하늘에 신호등 대신 홀로그램 영상이 뜰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해진다. 신호등 불빛이 제 자리서 그냥 반짝여도 괜찮을 텐데 방향을 옮겨가며 좌(左)로 한번, 우(右)로 한번 깜빡여서이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한번은 이승을 향해, 한번은 저승을 향해 비추는 것일 게다. 한번은 이 세상의 어둡고 쓸쓸한 곳에 자리한 채 죽어가는 자에게, 또 다른 한번은 이미 찬 곳에 누워 있어 침묵하는 모든 자에게. 점멸하는 신호등 빛은 진혼의 불빛인가보다.
빈 하늘에 매달려 흩뿌리는 노랑 신호등 불빛이 외롭고 쇠잔하다. 검은 빛이 섞여 유현(幽玄)한 느낌도 자아낸다. 오래도록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계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하루 두 번밖에 허용되지 않는 면회시간에 찾아뵈면, 여윌 대로 여위어 한줌도 안 돼 보이는 어머니는 반쯤 일으켜 세워진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인공호흡기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줄을 몇 가닥 달고 누워 계셨다. 그 모습이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기이한 공간에 떠 있는 인형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밤의 우수와 적막은 사람의 마음을 회한에 잠기게 한다. 생각해보면 오가는 삶의 길목과 고비마다 신호등이 있었던 것 같다. 붉은 신호등이 켜 있는데도 눈치 보며 다른 사람에 휩쓸려 길을 건너간 적도 있고 정작 푸른 불이 켜 있을 때는 나아가기를 겁낸 적도 있었다. 이제 스스로 판단하여 길을 건너도 되는 노란 점멸등을 보면서 오히려 갈 곳 몰라 망서린다. 나는 짐짓 시인이라도 되는 양 허공에 대고 묻는다. ‘내 호올로 어디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터널처럼 뻗은 단지로 들어서는데 언뜻 한 생각이 스친다. 내가 지금 위치한 곳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다. 나는 도상(途上)에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서있는 것이다. 외출해 일을 보거나 가끔은 귀가를 미루며 거리를 유랑하다 집으로 향하는 삶의 방식이 어제 오늘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오래 된 습관이나 관성이라고 해서 멀리할 것만은 아닌 듯싶다. 되풀이 되는 일상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삶의 무게가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개별자이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원래 외로움을 감기처럼 달고 살기 마련이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외로움과 그렇지 않은 외로움은 다르다. 돌아갈 곳이 있고 기다려 줄 사람이 있는 외로움은 견딜만하다. 나에겐 누추하나마 지친 몸을 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은가. 그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단 말인가? 신호등의 안부가 궁금하다. 노랑 불빛은 여전히 홀로 반짝이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내가 사는 층 아파트 창에서 발그스레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잠들어 있던 마음 속 신호등에도 불이 켜진다. 마음에 차고 넘치는 따뜻한 불빛은 단지를 밝히고 동네 길을 휘돌아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슬픈 구도(構圖)’를 떨치고 걸음을 빨리한다. 집으로.
* <<에세이문학>> 2014 가을호
# <에세이문학>> 2014년 수필 20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