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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지 않는 고백    
글쓴이 : 오정주    25-11-13 00:12    조회 : 852

            멈추지 않는 고백 

                                                                                         오정주 

 첼로의 첫 선율이 흐르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촉촉해진다. 화려하거나 극적이지도 않은데 단박에 마음을 빼앗겨 감정이 흔들린다. 낮은 한숨처럼 토해지는 현의 저음에 이끌려 주저앉아 귀 기울이게 된다. 슈베르트(1797~1828)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그렇게 시작된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현악기 아르페지오네(arpeggione)’슈베르트는 이 낯선 악기를 위해 가을의 침묵 같은 음악을 남겼다. 오늘날 이 곡은 첼로나 비올라로 연주되지만 애초에 아르페지오네만을 위한 유일한 소나타였다.

1823년 요한 게오르게 슈타우퍼가 만든 아르페지오네는 기타와 첼로의 중간형 악기로 여섯 줄을 활로 켜는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가볍고 투명한 음색은 오케스트라나 실내악에 어울리지 않았고, 구조상 개량도 어려워 더 나은 악기에 밀려났다. 게다가 기타와 첼로의 장점을 온전히 살리지 못해 연주자와 작품도 드물었고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병세가 깊어지던 1824, 그는 친구가 만든 새로운 악기를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한 곡을 써 내려갔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음악 속에서 위안을 찾았던 그의 조용한 헌정이었다. 그러나 악기와 함께 곡도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침묵을 깨운 건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난 1871년이었다. 브람스를 비롯한 후배 음악가들의 노력으로 이 곡은 다시 무대에 올랐고, 20세기 초부터 첼로나 비올라로 연주되며 슈베르트 후기 음악의 정수로 재조명되었다.

 

17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가난한 교사 집안에서 성장한 슈베르트는 짧지만 뜨겁게 살다 간 선율의 시인이었다. 1822, 스물다섯의 그는 매독(syphilis)에 걸렸다. 당시 빈은 이 병이 만연했고 치료법은 없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도덕적 낙인이 찍혔다. 그는 병을 숨긴 채 살아야 했기에 인간관계에서도 점점 위축되었다. 이후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그는 병마와 싸우며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그 흔적은 그의 음악 곳곳에 스며들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선율에는 병마와 싸우는 고독, 스러져 가는 청춘에 대한 체념, 그리고 끝내 놓지 못한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다. 슈베르트는 당시 심신이 무너져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 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라네. 건강은 회복될 가망이 없고, 희망은 사라졌으며,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시간은 고뇌로 변했지.”

그러나 그의 투병 시기는 역설적으로 음악적 절정기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가곡과 실내악, 교향곡 등을 구상했다. 겨울 나그네, 피아노 3중주 2, 죽음과 소녀, 현악 4중주 15같은 명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으며 생의 마지막엔 백조처럼 절창을 토해낸 백조의 노래도 있었다. 그 곡들에는 삶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듯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불안과 절망을 껴안은 채 멈추지 않았던 고백은 오히려 그의 짧은 삶을 가장 깊고도 고요한 음악으로 채워놓았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완성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이 낭만주의 특유의 우수에 찬 선율을 품고 있다.

남몰래 흐느끼는 듯한 1악장, 고백하듯 조용한 2악장, 그리고 어디인가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 듯 맴도는 마지막 악장. 그 서늘하고도 다정하며 방황하듯 흐르는 음의 결은 가을을 꼭 닮았다. 역시 슈베르트는 단순한 선율과 화성으로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천재적이다. 차이콥스키가 문득 떠오른다. 그들은 마음을 꿰뚫는 선율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음악으로 마음을 흔드는 방식엔, 시대도 국적도 없다.

 

1악장, Allegro moderatoG장조 특유의 맑고 순수한 선율에 어딘가 애틋한 정조가 스며 있다.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애잔한 선율은 마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머금은 듯, 고독하고 아련하다.

2악장, Adagio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시작된다. 음악은 먼바다로 흐르듯 깊은 침잠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처럼 조용한 독백이 흘러나온다. 사라졌던 것들이 하나둘 돌아와 그의 곁에 앉아 속삭이는 듯하다.

3악장 Allegretto는 앞 두 악장의 침잠과 달리 밝고 활기차게 시작된다. 경쾌한 리듬 속에 서늘한 슬픔이 스며든 헝가리풍 정조가 악장 전반을 지배한다. 오스트리아 귀족의 초청으로 헝가리 국경 근처에서 요양 중이던 슈베르트는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던 헝가리 민속 음악을 서정적으로 녹여냈다. 우수 어린 반전과 점점 고조되는 힘찬 에너지가 어우러지며 단조에서 장조로 바뀌는 구조는 어둠을 지나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병 속에서도 끝까지 작곡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 음악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외로웠고 떠난 뒤에야 이해받은 사람. 슈베르트는 생전에는 대중적 명성을 얻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예술가곡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음악을 써야만 했다.”

고독과 결핍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음악으로 세상에 맞섰던 그의 치열한 몰입은, 서른한 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가을은 사라진 것들의 계절이다.

찬란한 것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것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길 위를 구르는 낙엽은 마치 슈베르트의 단조 선율처럼 문득 사람을 멈춰 세운다. 그 첫 음 하나에 불현듯 눈시울이 젖고.

남은 것들과 사라진 것들 사이

그 고요한 경계에 가만히 머물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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