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봉혜선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ajbongs60318@hanmail.net
* 홈페이지 :
  낙수(落水, 落手)의 순간    
글쓴이 : 봉혜선    26-04-05 20:15    조회 : 228

낙수(落水, 落手)의 순간

 

 봄이 올 듯 화사한 날들이 계속되던 중 난데없이 폭설이 내렸다. 비로 시작했는데 진눈깨비네 하던 때를 거쳤고 집 안에 들어온 후 이삼 일을 눈 내리는 광경을 완상했었다.

 그러다 마주친 광경이다. 물이 툭툭 듣고 있다. 한 방울씩, 우르르이기도 했다가 여러 겹인 듯도 하지만 한 방울씩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아파트 동마다 유모차나 휠체어가 굴러들어갈 수 있게 휘어놓은 완만한 경사 길의 낮은 담 위로 현관 지붕에서 눈 녹은 물이 한 방울씩 빠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다. 담에 부딪히는 물방울마다 하나의 왕관을 만들고 있었다. 견고한 시멘트는 떨어져 흔적도 없이 부서지는 투명한 왕관이 머무는 자리였다.

 예전 모 우유 회사가 우유 한 방울이 우유가 든 통에 떨어지는 모습을 근접 촬영한 동영상으로 광고를 내보냈다. 그 우유를 먹으면 왕이 된다는 광고였을까, 아니면 우유의 진한 크리미함을 나타낸 광고였을까. 왕관의 느낌이 우유의 하얀색과 썩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느낌과, 연출된 모습은 아니라는 믿음이 여태 남아 있다. 그 광고를 보고 딱히 우유를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도 말이다.

 걷기 모임에서 아차 할 사이도 없이 미끄러져 팔목 부상을 입었다. 서울에서 내린 비는 걷기 모임이 있던 강원도 인제에서는 원경에 설경을 지었고 동양화에서나 볼 법한 설경은 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90명이 함께 마음을 모아 걷는 날은 하늘도 날씨도 동참하는 듯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푸근하기가 일쑤였다. 그 날도 그랬다.

 조심하며 걷는데도 작은 살얼음이 있었다. 오전 걷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방심한 내게 시련이 급히 내려졌다. 평지였고 나중에 보니 방석만한 살얼음이었다. 대여섯 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소식도 나중에 들었다.

 특히 오른쪽 팔목이라 하니 타인들의 걱정의 정도도 더하다. ‘아휴, 오른쪽이라니 불편하겠네요.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어쩌다 그랬어요, 그래...’ 걱정 반, 꾸중 반, 놀림 반, 그리고 호기심도. 불편하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경험자들임에 틀림없다. 나도 경험치를 더하는 계기로 삼자. 세상에 대해 할 말 한 마디 추가다. 불편한 것 체험 학습 시간이다.

 매일 하던 운동 시간이 되자 몸이 근질근질하다. 창을 통해 보니 지붕 위 눈들이 얇아지고 있다. 가던 겨울이 본때를 보였으니 되었다는 마음인지 다시 발을 옮기고 있고, 오던 봄의 기세도 만만하지 않은 듯하다. 체육 센터 옆 도서관에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헐렁하고 가벼운 외투를 입은 옷에 걸쳤다. 시선들에서 자유롭지 못해 열람실에 앉지 못하고 빌린 책을 왼쪽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또 다치지 않으려 흰 눈을 겁내며, 반짝이는 곳을 피해서.

 하찮을 수도 있고, 주로 무리지어 떨어지는 물방울이기에, 방울마다 귀하다는 느낌을 갖지는 않았다. 방울마다 하나의 왕관이라는 순간의 놀라움을 오래 보다가 연못이나 물 고인 곳에 떨어진 빗방울이 그리는 동심원에 생각이 닿았다. 점만 한 물방울마다 퍼져 나가는 거리나 넓이는 얼마나 넓은가. 그것에 영향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금방 사라진대도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한 우리 각자는 얼마나 큰 존재냐.

 아프다니, 다치다니텅 빈 마음이다다른 세상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부상병 피하듯 피한다. 시선이 잠깐 다친 곳을 훑는다. 영락없이 부주의한 중년 아줌마, 어쩌면 할머니. 머리니 매무새를 매만지지 않은 모습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행선지가 도서관이니 자위해볼 밖에. 미모란 한 때이고 정신이 못 생긴 것보다 낫다!고 외친다. 소리 없는 아우성.

 팔목 뼈 두 개가 다 부러진 낙상은 나를 아주 다른 세계로 이끌고 있다. 30년 넘게 해오던 운동과 샤워, 관절, 구부러짐, 일상, 보통이라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대개의 것들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관찰하게 했고 천천히 살게도 해주었다.

 팔목 뼈 두 개가 다 부러진 찰나라는 순간은 얼마나 긴 회복 시간을 요구할 것이며 평생 어떤 후유증으로 남을 것인가. 빗방울이 부딪는 순간은 짧으나 살아가는 중에, 특히 어려운 때마다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긴가. 떨어져 내려 부서져 사라지는 순간에 비로소 영광의 왕관을 그리는 빗방울에 비해보자. 하물며 사람인 나는 왜 순간마다 영광의 순간을 연출하지 못하는가.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들이 많다고 하고 회개하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고 한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영광의 순간을 살아있는 지금 왜 놓치는가.

 다쳐 가료 중인 지금의 시기에 다시 나를 점검하고 주변에서 걱정해 주고 도와주고 스몰토크로도 돌봐주는 주변인들과 만나야겠다. 젓가락질은 안 되고 숟가락도 입에 닿지 않지만 왼손 포크질은 가능하다. ‘쯧쯧걱정 어린 비아냥쯤은 각오되어 있다. 밀린 독서 목록이라는 행복의 왕관이 머리에 얹히는 것을 느끼며 오래 서 있었다. 성한 다리로 펄쩍 뛰어본다. 아잇, 팔목. 나쁘지 않은 골절이다.


<<문예바다. 2025, 여름>>




 
 

봉혜선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70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108473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1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