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는 나는 어쩌다 한 번씩 버스 타고 서울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워낙 길치라 출발 전날부터 심란하다. 그래서 나는 밤늦도록 내일 서울 가서 해야 할 일들을 교통정보까지 넣어 휴대폰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중요한 단체 약속도 있고, 미루고 밀었던 일들까지 완수하려면 헤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출발시간을 한 참 넘기고 있었다. 기절초풍하여 물 한 모금을 못 마시고 휴대폰만 챙겨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떠나려는 버스를 세우다시피 해 올라타니 헐떡거리는 내 숨소리가 너무 커 민망했다. 다행히 승객이 많지 않아 2인 좌석을 독차지한 후 숨을 고르면서 휴대폰을 열었다,
어머나 세상에 배터리가 부족해 거의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분명 충전시킨 것 같은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서울에 도착하면 충전부터 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 도착해 중간중간 충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허가되지 않았다.
초저녁이 되어서는 충전할 수 있었으나 별고없이 볼일을 다 보았기에 집부터 가고 싶었다. 어차피 집 앞까지 가는 버스도 없으니 일산 가는 아무(?) 버스나 타서 일산 초입에 내린 후, 집에는 무조건 택시 타고 들어가자고 마음먹었다.
잠깐 졸은 듯 싶은데 버스는 이미 일산에 도착해 어딘지 모를 곳을 달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기사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삑 소리와 함께 뒷문이 열렸다. 얼떨결에 당당하게 쫓기듯 내렸다.
어두웠다. 정류장에는 사람 한 명 없었고, 8차선 도로 위 불빛들만 쌩쌩 달렸다. 일산에 오래 살았지만 낯설었다. 택시만 타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걸으며 힘들게 택시를 세웠다. 그러면 엉거주춤 선 차에서는 “서울 어디요? ”가 튀어나왔고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팽하니 가버렸다. 경기도 택시는 이마저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택시 타려면 카카오택시를 이용했다.
핸드폰 없던 시대에도 불편 없이 잘 살았는데, 핸드폰 방전되었다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집도 못 찾아가나 싶어 기운이 빠졌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면 모른다는 사람들 뿐이었다. 한 명은 “웹 보고 찾아가세요”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이정표를 보며 집 방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하늘색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아직도 공중전화가 있었어?'하며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후다닥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아 맞다 동전이 있어야지’…. 그러나 늘 가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동전 지갑이 안 보였다. 부스 안에 쭈그리고 앉아 가방을 다 뒤져 보았지만 없었다.
도로의 밤은 깊어만 갔다. 슬슬 공포감이 밀려오면서 경찰서가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자고 마음먹었다. 경찰이 왜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할까? 생각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얼마나 걸었던지 발바닥이 따끔거리고 발가락이 아팠다.
누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괜스레 겁이 나 뒤도 돌아보지도 못하고 걷는데 어느새 내 옆을 휙 지나갔다. “하늘만큼 땅만큼 널 사랑해” 소리가 들렸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의 늦은 밤 사랑 고백이 누구에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싱그럽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학생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낯익은 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핸드폰은 유치원생도 가지고 다닐 만큼 필수품이 되었다. 각 가정의 가계부에서 통신 요금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장점 많은 핸드폰이라도 단점 또한 많아 인간은 물론 대자연에까지 파생된 심각성은 상당 수준에 도달했다고 본다.
박경화 선생님의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를 읽어보면 게임기, 휴대폰, 노트북 등에 쓰이는 탈탄의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탈탄이 콜탄 속에 묻혀있어서 콜탄이 많은 고릴라의 터전을 잠식하게 되니 고릴라가 멸종위기 동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크게 걱정하며 지나친 핸드폰 사용과 교체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부터도 핸드폰 방전만 되어도 이 모양이니 핸드폰 없이는 못 살지 않는가? 아이들은 어떠한가? 친구랑 같이 있어도 핸드폰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공원을 가로지르자 그림처럼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반가운 경기도 택시였다. 나는 엉금엉금 올라타다시피 해 기본요금도 안 나올 거리지만 무조건 가달라고 애원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 넘으면 경찰에 실종신고 하려 했다며 가족들이 걱정 섞인 위로와 질책을 했다. 난 그 말들을 귀담아들으면서도 공중전화 부스의 쓸쓸함과 동전 지갑의 부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내 동전 지갑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기진맥진 되어 일어날 수 없었지만, 힘을 내 찾아보려 하는 순간 스치는 생각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지인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핸번조차 또렷이 기억나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나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리 빈 깡통이 되어간단 말이냐? 정말 큰 일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