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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삶을 깨우치다    
글쓴이 : 장석창    25-11-02 08:39    조회 : 1,509

기러기, 삶을 깨우치다 / 장석창



나는 한 마리의 기러기, 가없는 밤하늘을 표류한다. 망망대해에서 방향감을 상실한 채 하염없다. 동행하던 무리는 목측으로 가늠할 수 없이 멀어져가고, 삭풍을 거스른 날갯짓에 날개깃이 너덜거린다. 무리를 이탈한 기러기 두 마리가 따라붙는다. 내가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 옆에 머무르리라. 어서 육지를 찾아야 한다.

여기는 여수 오동도, 해안가 갯바위에 내려앉는다. 묵상하듯 주변을 바라본다. 만월이다. 해수면에서 상승한 수적이 달빛을 머금고 보랏빛으로 산재한다. 사선으로 흐트러진 구름은 지나온 여정의 궤적이 아닐까. 수평선 너머 먼 바다에서 이는 격랑도 압도적인 수량에 순화되는 것이어서 이곳으로 밀려드는 수파는 지금 잔잔하다. 마지막 해파가 해안선에서 팝콘 튀듯 용솟음친다. 만개한 설유화 꽃송아리같이 찬연하다. 이곳은 마음속 안식처요, 그리움의 대상이다.

어린 시절 동백꽃망울이 맺힐 무렵이면 남쪽 바다로 날아갔다. 아빠 기러기를 찾아 삼 형제가 함께했다. 장거리 이동에 힘이 부쳤다. 형제들끼리 큰 소리를 내며 서로를 격려해주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녔지만, 오동도가 제일 좋았다. 바다 저편을 그리며 호연지기를 키웠고, 해식애에 부딪히는 파도의 주기성에 호기심이 일었다. 대숲에서 하늘 높이 비상하는 우두머리 기러기는 또 얼마나 부러웠던가. 동백꽃 개화가 절정에 이를 즈음, 북녘으로 돌아갔다. 꿈을 키워나가던 그 바다에서의 겨우살이가 아슴푸레 떠올랐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젊은 시절 이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군계일학이 되고 싶었다. 다른 기러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어 무리를 이끄는 게 삶의 지향점이었다. 비행술을 연마하고 가다듬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가 자지러지기도 했고, 도를 넘게 상승하다가 꼬꾸라지기도 했고, 무작정 먼 곳을 향하다가 헤매기도 했다. 날갯짓은 희망이었고, 기쁨이었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마침내 작은 무리의 우두머리로 부상했을 때 느꼈던 자만감이란.

우월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열등감으로 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무리가 합세하여 규모가 점점 커졌다. 큰 집단이 형성되자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다. 우두머리 간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가시밭길이었다. 경쟁자들의 비행술은 탁월했다. 타고난 유전자에 노력이 배가되니 쫓아가기 힘들었다. 그런 그들이 부러웠다. 편대 안에서 내 위치는 한 단계씩 미끄러졌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날개를 휘저었다. 가끔 바로 앞의 기러기를 추월하기도 했지만, 우두머리는 저만치 멀리 날아가 버린 후였다.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적 가치에 목매던 삶이었다. 고정관념에서 탈출하려고 애써봤지만, 주위의 눈총에서 편안할 수 없었다. 아니, 내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선회 속도, 상승력, 항속거리는 달성해야 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성과로 여기자 한계점에 봉착했다. 이를 내 욕심의 문제로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계가 없는 비행,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삶이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숙고 끝에 남해안에 정착하기로 했다. 기러기가 아닌 거위로 살아가기로 했다. 기러기가 유목민이라면 거위는 토착민이다. 기러기가 희망의 연속이라면 거위는 기대의 단절이다. 기러기가 미래에의 도전이라면 거위는 현실에의 안주다. 처음에는 마음 편했다. 그런데 한동안 날지 않으니 나는 법을 잊게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날개깃을 가다듬었다. 다시 기러기가 되기로 했다. 비행술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도약을 꿈꿨다.

고지에 등정한다고 마냥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이 설정된 기준점에 불과했다. 다음 단계에 집착할수록 내구성에 문제가 생겼다. 너무 결과에만 치중했다. 그런데 목표를 위해 배우고, 경험하고, 그래서 좀 더 자유롭게 되는 과정 안에 진짜 삶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유를 향유하려 함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니까 말이다. 이제부터 삶 자체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천천히, 나즈막이, 가직이 날며 삶을 만끽해야겠다.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데 징검다리가 되어주리라. 가다가 멈춰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감촉까지 잔잔히 느껴보고, 아름다운 숲이 보이면 시야를 좁혀 나무 한 그루까지 유심히 살펴보고, 지저귀는 새소리며 하찮은 벌레 울음소리까지 가만히 귀 기울여보고, 스쳐가는 풀밭에서 풀 한 포기 냄새까지 세세히 맡으면서 세상 나들이를 마무리하고 싶다.

삶은 누군가와 동행하는 긴 여행이다. 무리 속 기러기들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상호보완적이다. 기러기는 생존을 위해 장거리 이동을 한다. 이동이 삶의 목적이다. V자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는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네들은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정점에서 날아가는 우두머리의 날갯짓은 상승기류를 일으켜 뒤따르는 동료의 힘을 덜어준다. 동료들은 쉴 새 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우두머리를 독려한다. 우두머리가 지치면 서로 자리를 바꿔 무리를 이끈다. 혼자라면 조금 먼저 갈 지 모르지만, 함께하면 훨씬 멀리 갈 수 있다. 한 마리가 낙오하면 동료 두 마리가 따라붙어 끝까지 함께 한다. 내가 힘들고 방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커가면서는 형제가, 지금은 아내와 아들이 내 곁을 지켜준다.

갈숲에 바람이 인다. 훈풍이다. 자리를 털고 날아오른다. 기러기 두 마리가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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