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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마시며    
글쓴이 : 봉혜선    25-03-20 08:15    조회 : 404

차를 마시며

   

 더 할 수 없이 허허롭고 빈 마음일 때, 사람 사이에서 외로움만이 보일 때, 그 무엇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을 때, 글자도 맘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뜨거운 차를 앞에 두어볼 일이다. 그런 순간에 차 한 잔을 떠올리는 것은 축복에 가까우리만치 느껍다. 뜨거운 차 한 잔이면 때로 세상의 행복을 다 쥔 듯 마음이 헤벌어진다.

 밭에서 직접 갈무리해둔, 어디어디에 좋다는, 그러나 어디도 나쁘지 않아서 별무소용이므로 무엇을 넣어 우려도 좋을 재료인 엄나무, 작두콩, 뽕나무 가지, 가시오가피 열매나 가지들을 기분에 따라 넣고 끓인다. 큰 주전자에 넣고 강한 불에 올려놓는다.

 푹푹 끓인다. 차를 달인다. 차를 우린다. 끓이는 물의 색이 진해질수록 마음은 안정되어간다. 동동거리던 마음을 멈추고 가만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건더기들이 기쁜 듯 춤을 추며 뒤채는 소리를 듣는다. 오랜 시간 여유가 나야만 하는 이 일은 마치 마음을 수양하는 것과 같다. 무념이야말로 생각이 들어찰 곳이 아닌가.

 입맛, 기분, 눈의 호사까지 가장 맞춤하게 맞춰줄 수 있는 사치가 바로 차 한 잔이다. 무엇이라서 욕구가 이토록 손닿는 데에서 이루어지겠는가. 가장 빨리, 가장 가깝게 가장 뜨겁게, 채울 수 있는 욕망이다. 집을 직장으로 삼고 있는 주부에게는 집이 가장 편안하고 차 마시기에도 적당하다. ]

 외따로임이 사무칠 때 하루의 대부분을, 일주일의, 한 달의, 그런 연유로 일 년의 대부분 동안 벗이 되어주는 차. 따뜻한 차는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꽁해서 틀어진 간밤의 부부관계에도 먼저 손을 내밀 마음이 된다. 큰 컵을 준비하고 앉으면 바라다 보이는 풍경인 건너편 아파트 지붕 위로 하늘이 들어온다.

 때로 여유를 누리고 싶어 멀리 있는 분위기 좋다는 찻집을 찾곤 한다. 옆 자리에 놓인 투명하고 맑게 우러난 색과 다기 모양이 눈길을 끌어서, 혹은 뜨거운 물 무한 리필에 이끌려 차를 주문하곤 한다. 집에서 멀어진 감성이 차에 닿자 밥과는 다른 포만감에 젖는다. 마음의 포만, 여유의 포만.

 심심한 맛의 차를 무슨 맛으로 마시나 싶었다. 커피 같은 흔하거나 진한 맛이거나 달콤한 맛이 아닌 맨숭맨숭한 맛이 어떤 맛인지 호기심도 발동했다. 집 떠난 자리에서도 맥 빠지는 소리나 싱거운 이야기를 하는 지인들의 소소한 수다를 들으면서도 뜨거운 물을 부으면 감추고 있던 맛과 색을 새삼스레 내놓는 차로 인해 차 맛에서 위안을 얻곤 한다. 요즘 카페에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혼족들의 모습에서도 과거의 내가 보인다.

 ‘첫 번째 우린 것은 배린내가 나는 10대 인생의 맛, 두 번째 우린 것은 혈기 방장한 20대의 맛, 세 번째 우린 것은 삶에 맛을 바야흐로 알기 시작하는 30대의 맛, 네 번째는 깨달음이 보일동말동하는 40대의 맛, 다섯 번째는 부처님이 눈을 반쯤 감은 뜻을 알기 시작하는 50대의 맛이다. 연꽃잎을 스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 60, 연꽃이 다 지고 연못의 황달 든 연잎에 어린 불음(佛音)을 듣는 70, 여덟 번째는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부처님 말씀 알아듣는 80대의 맛, 아홉 번째 우린 것은 햇볕에 잘 바래진 모시같이 머릿속이 바래지는 90대의 맛, 열 번째 우린 것은 사바 세상과 아미타 세상을 넘나드는 맛.’ 초의스님에게 차 달여 먹는 법을 가르치신 벽봉 스님의 글이다.

 나이에 따라 차 맛이 바뀐다니 나이가 들수록 미각이 예민해진다는 것일까. 순해진 다는 것일까. 다른 맛을 깨우친다는 것일까.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서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러나오는 색이나 맛에 따라 인생의 맛도 달라진다는, 글에 인용하기에 다소 긴 이 경구가 글을 쓰게 된 동인이기도 하다.

 ‘차는 액체로 된 지혜라며 하루 다섯 잔의 차를 마셔야 한다고 했다. 차를 식도록 두어볼 일이다. 뜨거움을 놓치고 생각에 끌려들어가 있다가 무거운 손을 뻗어 차를 들이키면 문득 차를 식힌 원인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돌파구도. 차가 가진 맛이나 향을 놓친다 해도 화살표처럼 나아갈 바를 가리켜 주는 차는 또 다른 선생이다. 오래 우린 맑은 차를 마셨으니 오늘도 잘 살 수 있겠지. 그러면 희망으로 나아가야겠다.


<<선수필>>2024, 가을, 제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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