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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인연    
글쓴이 : 윤기정    25-03-19 09:28    조회 : 95

3월 인연

 

윤기정

 

 

학교의 새해는 3월부터다. 평생 학교에 다녀서인지 퇴직하고 여러 해 지났건만 지금도 3월이 새해의 시작으로 착각한다. 32, 직원 조회가 끝나면 새 출석부를 들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러 긴 복도를 걸어서 새 교실로 향한다. 앞문 열고 들어서면 교실 안의 모든 눈동자가 내게로 향한다. 시작이다. 새해의 시작은 해마다 그렇게 열렸다.

출석부를 열고 첫 출석을 부른다. 그 전에 한 가지 술수를 쓴다. 교실을 향해 걸어가면서 출석부를 슬쩍 열어 보고 첫눈에 띈 이름 하나 외어둔다. 출석 부르기 전에 그 이름을 부른다, 어떤 움직임 하나가 움찔하며 몸을 바로 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다른 아이들은 얼음이다. 그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상황에 따라서 반가워.”라든가바로 앉아야지.”라고 한마디 던진다. 반응은 뜨겁다. ‘새 담임 선생님이 벌써 우리 이름을 다 아네!’하며, 놀라는 기색이 온 교실 안에 순식간에 번진다. 한 아이의 이름은 그렇게 외운다. 그 다음 출석을 부르며 한 아이 한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첫 일 주일은 비슷한 방식으로 1교시를 시작했다. 학급당 학생 수가 80명을 넘던 때에도 그런 방법으로 일주일이면 학생들 이름과 얼굴을 거의 익힐 수 있었다.

첫 수필집 출판기념회에 누구보다 우선해서 제자들을 불렀다. 내 글에 숱한 소재와 영감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그들이다. 매인 곳 없는 내 생각만 하고 평일을 잡았다. 점심시간인데도 여러 제자가 와 주었다. 하객 소개하던 차 제자들 소개하다가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뜨거워진 감정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해 32일 불렀던 이름들, 그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질 줄은 그때는 몰랐었다. 긴 세월 이어온 인연과 환갑 넘거나 다된 제자들 모습에 눈물샘이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제자들 참석이 무리했나 싶어서 미안했지만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갈등할 때였다. 나를 눈여겨보던 중학교 동창인 친구 아버지가 길을 터주었다. 그분은 그때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그 길은 군대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진학 정보였다. 시간은 어느 것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떠밀리듯이 평생 학교만 다닐 수밖에 없는 그 길을 택했다. 선택 후에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교육을 하면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믿는 소신이 생겼다. 비로소 나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교사 경력의 반 넘게 6학년 학급을 담임했다. 6학년 담임은 수업 시간이 많고, 생활지도의 어려움 때문에 교사들이 꺼리는 학년이라 맡기가 되레 수월했다. 6학년 담임은 말귀가 통해서 편했다. 6학년 학생은 서투르지만 그나마 타인을 이해하는 사회성이 발달하는 시기라 제법 소통이 되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담임의 교육철학을 잘 받아들였고, 결과가 명백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컸다. 아이들은 졸업 후에도 우정을 나누며 성장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기뻤다.

아이들 처음 만나는 날, 페스탈로치와 내 생일이 같은 날이라고 얘기한 까닭은 그처럼 헌신하는 교육자가 되자는 자성예언(自成豫言)이었다. 아이들은 담임의 속뜻을 헤아리는 대신 그 날짜만 기억했다. 중학생일 때부터 선생님 환갑잔치 차려 주마던 첫 학교 제자들은 때가 되자 잊지도 않고 아내까지 불러내어 약속을 지켰다. 칠순 잔치 챙기겠다던 두 번째 근무 학교 제자들도 그 약속을 지켰다. 해마다 32일이면 나의 새 학생 아이들에게 너희는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1년 동안 애썼다.

이제나는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제자들과 지금도 만나기 때문이다.”라고 바꿔서 외치고 싶다. 모든 우연과 필연이 인연으로 엮여서 한평생을 살았다. 사제(師弟)의 연은 단연 선연(善緣)이다. 이제 새로운 3월 인연 맺을 일은 없지만, 세상 나들이 멈출 날까지 맺은 인연 아름답게 이어질 앞날을 그려 본다. 그리하여 올 3월도 환하리니.

 한국산문』 202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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