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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사법부를 존경하는 방법    
글쓴이 : 박재연    15-02-08 14:19    조회 : 4,793
  관습과 전통을 엄수하면서 시대의 흐름이나 요구 따위에 결코 영합하지 않는 사법부를 나는 평소부터 존경하여 왔다.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존경하옵는 사법부를 귀찮게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세입자의 두꺼운 뱃가죽을 째봤자 시원찮은 음식물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계약해지 내용증명을 보낸 후 본격 작업에 착수했다. 증빙이 될 만한 것은 물론 아무 관련이 없는 서류들까지도   가능한 많이 챙겨 넣었다. 법원엘 도착하니 법 없이도 살 수 없는 사람들로 창구는 이미 혼잡하다. 출입문 옆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는데 직원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몰래 의자에 본드를 칠해놓은 모양이다. 쓸데없이 입을 놀려 신성한 법원에 소음을 일으켜서는 안 되지만 입이나 손가락이 아닌 턱으로도 안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접수창구에는 나같이 정직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계단이 놓여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 간신히 작성한 서류를 내밀었지만 담당 직원은 퇴근 후에 모일 술집을 정하는 사안에 대해 전화로 협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일에 그토록 오래 통화를 하는 것을 보니 그는 혹시 나인가?
통화를 마친 그가 서류검토를 극구 사양하는 태도로 보아 그가 매우 겸손한 사람인 것은 물론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중용의 미덕을 가진 인격자임을 알 수가 있다. 판단은 다음 단계에서 할 일이니 오류가 발견된다면 나중에 연락이 갈 거란다. 그의 말로 추측하건대 법원에는 맞춤법 담당, 서식 담당, 용어 담당, 인지부착 위치확인 담당 등등 업무분장이 무척 세분화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법부는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직원들만 채용하는 것인지 아님 우체국과 자매결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법원 사람들은 전화나 문자보다 편지를 절대적으로 선호한다는 소문이 퍼져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직원도 술집 같은 중대한건에 대해 편지가 아닌 전화로 논의를 했다는 사실이 의아한데 아마도 그 전에 전화통화를 예고하는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며칠 후 확인을 해보니 무사히도 세입자에게 소장(訴狀)이 발송되었다. 하지만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대낮에 한가롭게 우편물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그녀)의 우울증부터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임무는 우편물을 전달하는 것보다 대문을 두드려보는데 있으므로 수취인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회 연속 빈집 문을 두드리는데 겨우 30일이 지났을 뿐이고 게다가 대문의 건강상태과 함께 우리 세입자의 양호한 정신건강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법원에 감사할 일이다.
  곧이어 주소보정을 명하는 편지도 날아왔다. 매일 저녁 어김없이 집에 불이 켜지는 것은 누구보다 옆집 사람이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신중한 법원은 옆집 사람의 말 따위 보다는 침묵하는 문서를 신뢰하는지라 세입자의 주민등록초본을 제출할 것을 명령한다. 정작 보정해야 할 것은 주소가 아니라 법원의 배달방식일 듯싶지만. 어쨌거나 초븐 발급 과정을 통해 동사무소 직원은 새로운 업무를 숙지하게 되었고 나는 남아도는 시간을 죽일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이다. 초본 제출과 함께 비로소 야간송달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진작에 하고 싶었으나 가까운 길도 멀리 돌아가라’, ‘쉬운 것도 가능한 어렵게 처리하라는 법원의 내부지침에 따라 소정의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세입자 점유 부분이 특정되어 있지 않으니 건물도면을 첨부하란다. 이미 첨부한 월세계약서에 ‘102가 기재되어 있을뿐더러, 집합건물에도 점유부분을 표시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더니 감히 판사님의 판단에 토를 달면 안 된다.”는 엄숙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 순간 몇 년 전 어느 정치인이 생각났다. 자칭 서민을 대변한다던 그는 뜻밖에도 옥탑방을 몰라 곤욕을 치렀는데 옥탑방=고양이가 사는 방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판사님도 집합건물=여러 세대가 집합하여 한 가족처럼 사는 넓은 집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혹시 판사는 그 정치인과 가족이 아닐까? 어쨌거나 판사님도 잘 모르는 것이 있다니 이참에 인간미와 더불어 친근함까지 느껴졌으면 좋겠다.
  도면을 발급받으러 구청에 갔으나 구청 직원은 무례하게도 나의 요구, 아니 판사님의 명령을 거부했다. 오래된 이 동네 건물들에는 도면이 없다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주어야 마땅하련만 발급불가함을 전하라는 것으로 보건대 구청 직원들은 나와 달리 사법부를 존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역시나 허술하게 넘어갈 법원이 아니었으니 억울하게도 불똥이 내게 튀었다. “당신이 그려서라도 제출하라는 명령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를 반()추상 도면을 그려 제출했다. 돌아서는 등 뒤로 그러기에 전문 대리인에게 맡기지 왜 이 고생을 하느냐?”는 직원의 진심어린(?) 말이 들려왔다. 제발 도면확인 담당이 편지를 보내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법원의 임무 중에는 세월은 결코 좀먹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이제 겨우 7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판결일이 다가오고 있다. 덕분에 나는 불안과 긴장을 오래 유지할 줄도 알게 되었고 법원 직원들의 겸손하며 낭만적인 업무태도와 성품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섬세하고 세밀한 사항들로 7개월간 법원을 다니다 보니 이제 내 집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남편과 싸운 날에는 친정이 아닌 법원마당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다.
 
2015.2.<<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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