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지던 어느 날
세상의 하고많은 꽃도 마음에 상처가 많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경전에서 일컫는 하늘꽃이 비 오듯 쏟아져도 잡념이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매화는 겨울 마른가지에서부터 시간을 견디며 준비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지.”
아득한 얘기지만 내가 매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친구 덕분이었다. 친구와 나는 새해 벽두부터 눈 속에 파묻힌 손님을 간절하게 기다리곤 했다. 그러
고는 어느 날 마음을 정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길을 떠났다. 길도 잘 모르면서 이곳저곳을 헤매 다녔다. 헤매다가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대도 아마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내 기다린 것은 얼어붙은 흙을 비집고 나오며 토해내는 설중매의 숨소리였다. 그때는 가지에 갓 트기 시작한 꽃움 하나에도 골똘했었다. 매화 소식이 들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힘겹게 그 앞에 서게 되면 둘은 말없이 모자를 벗곤 했다. 초록빛도 없이 피어야 하는 꽃, 달빛 보듬어 핀 꽃, 오랜 세월 우리를 철들게 한 꽃이었다.
친구는 해마다 봄이 시작될 무렵이면 내게 여행을 가자고 졸라댔다. 몇 년 전에는 중국 천태산 국청사에 있는 1400년 된 수나라 매화를 보러가자고 제의했다. 나는 뜬금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거절했다. 그 다음 해인가는 강릉 오죽헌에 있는 600년 된 율곡매를 보러가자고 했지만 역시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답했다. 또 어느 해에는 일본 타자이후의 ‘학문의 신’과 연관된 비매(飛梅)를 보러가지 않겠느냐고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얘기할 때도 무심한 듯 바쁜 듯,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익숙해져서 세련되고도 완곡하게 친구의 제안을 물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기실 이렇게 된 까닭이 매화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친구가 미워서는 더욱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어. 이젠 매화가 어디에나 있네.”
통속하여라. 함부로 사는 인생처럼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꽃, 사람들은 신이 나서 매화를 찾아 나섰다. 언제부터 매화가 만인의 기쁨이 되었나? ‘매은(梅隱)’이라는 내 별칭을 미련 없이 버린 것은 그 즈음이었다. 친구가 화려한 홍매처럼 살지 말고 숨어 피는 청매처럼 살라고 지어줬던 이름이다. 나에게 꽃을 두고도 질투를 한다고 수군거려도 할 말은 없다. 어떤 대상을 온전히 자신만이 독점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면 매화에 대한 내 감정은 질투가 맞는 것 같다. 매화지절만 되면 으레 퇴계와 두향의 러브라인을 인용하고, 매화차가 어떻다는 둥의 사설을 늘어놓은 글을 읽노라면 속이 뒤틀려서 나는 죄 없는 활자를 한참이나 노려보곤 한다. 매화에 관한 한 모르는 매화시가 없고, 어지간한 일화는 죄다 꿰고 있다고 믿는 나의 불온한 착각이라니.
언젠가 시기하는 마음에 대해 기술해 놓은 어떤 글을 읽었다. 시기하는 자는 타인이 복락을 누리는 걸 방해하려 든다. 시기는 ‘타인의 행복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통’과 가깝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며 집착하고 구속하는 원인이 그 대상의 쾌락을 방해하고 싶어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매화를 향한 내 감정도 그런 것일까. 매화의 붉은 꽃은 탁한 열매를 맺게 한다. 나는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매화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구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고,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슬을 받아 떨고 있는 매화를 사랑했다. 한편에선 그저 꽃이라서 환호작약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두 부류를 모두 인정할 때라야 그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매화, 저 자신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데 왜 나라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유일한 어떤 것을 내놓아야 할 때의 아쉬움은 크다. 더구나 그 시절 축적된 기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나와 친구, 그리고 매화는 합쳐서 하나였다.
밖에 봄이 무르익었다. 여전히 계절을 즐기려는 행렬이 소란스럽다. 어찌된 건지 금년에 친구는 탐매 여행을 떠나자는 말을 미루고 있다.
“매화가 지천이어도 다 똑같지는 않아. 낱낱의 의미는 다른 법이지. 사람들의 사랑법이 각기 다르고 우리 얘기가 남들과 다른 것처럼.” 생각해 보면, 나는 진정 봐야 할 것은 간과한 채 눈에 드러난 것만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친구는 거짓말처럼 몸이 쇠잔해져 있었다. 벌써 우리의 상춘곡이 끝나버린 거나 아닌지!
매화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