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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 블루스    
글쓴이 : 김순례    15-09-15 12:25    조회 : 6,242
명동 블루스
 
 남산과 명동은 나에게 특별히 인연 깊은 장소이다.
1970년대 중반 남산에 있던 숭의 여자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 앞에 KBS 방송국이 있어서 자주 연예인들과 스치곤 했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명동을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졸업 후 직장도 명동근처여서 그 동네에서 자주 얼쩡거렸다.
 
 명동입구 내가 근무하는 백병원 이비인후과 소속 ‘청력 검사실’은 완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닥터의 오더를 받아 검사를 진행하는 청력 검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75년 말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이 대한 투자금융으로 매각되고 그 골목어귀에 지금도 존재하는 삼일로 창고극장이 생겼다. 국립극장은 매각 된지 34년 만에 복원사업을 거쳐 2009년 6월 다시 오픈하였다. 창고극장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무대에 올린 것을 본 것이 나의 첫 연극관람이었다. 어두운 조명아래 당시 나로선 이해 할 수 없는 언어들의 나열이었지만 훅! 스치는 무언가가 가슴에 뜨겁게 와 닿았다. 처음 느끼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기다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돌아보게 했다.
 
 가끔은 혼자 명동 중앙우체국 뒷골목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 ‘필하모니’의 큰 소파에 푸욱 파묻혀 조금씩 클래식 음악에 취해갔다. 인간의 소리에 가장 가깝다는 중저음의 첼로 음색에 매료되었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조곡>, 파블로 카잘즈의 연주는 내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오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평소 카잘즈의 철학이 ‘질서 안의 자유’라고 한다. 그 즈음 나의 궁핍한 정서가 반영되듯 즐겨듣는 음악마저도 자석처럼 그런 음악들이 좋았다.
명동 중앙 통에는 지금은 사라진 ‘쉘부르’ 라이브카페가 있었다. 당시 수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웃고 울리던 가수들의 등용문이었고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의 산실이기도 했다.
 
 불란서 문화원을 넘나들며 프랑스 영화에 넋 없이 빠져있기도 했던 기억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프랑스영화 ≪남과 여≫≪금지된 장난≫≪마농의 샘≫≪태양은 가득히≫…….등을 보며 프랑스 배우 장 가뱅, 알랭 들롱, 이브 몽땅, 그들에게 빠져들었다. 그 무렵 외화(外畵)를 보며 가슴에 털이 난 남자, 수염이 많은 남자가 멋져 보였고 눈은 자꾸 높아졌다. 영어를 배운답시고 모 대학 어학당에 타임(TIME)지를 끼고 다니기도 했다.
 
 20대는 그렇게 공허함을 덮기 위해 겉멋에 충실했었다. 한편으론 이성에 대한 열망이 나를 우쭐하게도 했고 기죽여 놓기도 했다. 몇 번의 가벼운 연애는 해 봤지만 마음에 맞는 상대가 없었다. 꽃 같은 나이에 불같은 연애도 못 해본 것이 스스로 봐도 한심했다. 주말이면 친구와 영화를 보며 명동 길을 오르내렸다. 찻집에서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며 철학자인양 떠들어 대는 것도 시시해졌다. 모든 것이 시니컬해질 무렵 스스로 고독 속으로 몰아 혼자 있는 것을 즐겼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사는 것이 재미없어졌다.
 
 창문이 없고 방음이 잘되는 청력 검사실은 나만의 안식처가 되었다. 환자가 없는 시간과 퇴근 후에는 음악에 취하고 책에 취해서 점점 더 사람들을 기피했다. 나를 그곳에 가두는 것이 편안하고 좋았다.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던 첫 날, 훤칠한 키에 하얀 와이셔츠를 걷어붙인 그의 팔에 굵게 선 혈관이 눈에 띄었다. 서로가 어색했다. 남들이 다 잘생겼다고 하는 그의 앞모습이 내게는 느끼하게 느껴졌다. 그도 나도 서로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한 번 그렇게 만나고 끝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그가 내 직장으로 찾아왔다. 둘 다 직장이 명동이라 명동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시 만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옆얼굴을 보니 한쪽만 쌍꺼풀진 눈에 거무튀튀한 수염자국이 남성미를 물씬 느끼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알랭 들롱의 옆모습 같기도 했다. 그때부터인가? 그의 옆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혼자 있는 것을 은근히 즐겼던 나는 차츰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아지고 자꾸만 보고 싶어졌다.
 
 그와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상도 가치관도 직업관도 경제관념도 취미도…….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놨는지 가끔은 신기하기만 했다. 둘이 데이트하다가 누군가 삐끗하면 하루쯤 지나 어김없이 한 사람이 찾아갔다. 둘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만나 말없이 남산공원, 명동거리, 광화문,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먼저 전화하는 자체가 화해의 제스처가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가 화해의 방편으로 영화를 보여주었다. 다리가 유난히 예쁜 배우 이보희가 주연을 한 영화가 성황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무심한 아니 엉큼한 그가 나를 위해 선택한 영화가 ≪무릎과 무릎사이≫였다. 에로틱한 장면이 나오자 그가 떨리는 손을 내 손 끝에 대고 잡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하고 있었다. 바르르 떨고 있는 손이 왜 그리 안타까운지 내가 덥석 그 남자의 손을 잡아버렸다.
 
 명동의 겨울은 연인들에게 참 좋은 장소이다. 골목길을 누비다 명동성당 어귀를 산책하고 잠시 성당 안에 들어가 웅장한 성전내부에 취해 보기도 했다. 후미진 명동 뒷골목 어귀 허리가 굽은 할머니낙지 집에서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후끈해졌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추우면 롯데백화점 안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증권가 골목 돌 냄비 우동가게에 들어가 바글바글 끓는 뜨끈한 뚝배기 한 사발 먹노라면 행복이 스멀스멀 밀려오곤 했다. 두 손을 꼭 잡아 그의 코트 주머니에 넣고 그의 옆모습에 취해 걷는 그 길이 춥고 멀고 다리 아파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나는 스파게티를 좋아했고 그는 뚝배기 된장찌개를 좋아했다. 나는 커피를 좋아했고 그는 쌍화차를 좋아했다. 나는 맥주를 그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나는 발라드를 그는 트로트를 좋아했다. 나는 문화가 산책을 그는 수목원 산책을 좋아했다. 나는 캐주얼을 그는 정장을 좋아했다. 나는 책 읽기를 그는 TV 보기를 좋아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고 그는 무신론자였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딱 맞는 것이 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건실하게 살아가기이다. 부족하고 힘들어도 내 형편껏 살기이다. 그가 자라온 환경과 내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지만 성장과정에서 얻은 삶의 법칙이 생활 속에 녹아 내면화되었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첫 아들을 낳던 해 그는 명동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여성복을 만드는 천재였다. 그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무진장 바쁘고 무진장 힘들고 사업도 경제력도 놀라운 속도로 번창해 나갔다. 가끔 남편은 두 아들 녀석들의 멀미나는 전쟁터에서 나를 불러 명동의 추억으로 돌려주었다. 추억을 더듬어 케이블카도 타고 낙엽 떨어진 남산 길을 따라 명동성당까지 손잡고 걸으며 어스름 연애시절의 추억에 젖곤 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명동! 그곳에서 청춘의 꽃이 피고 젊은 피는 뜨거웠다. 벌과 나비가 만나 꽃봉오리 위에서 춤을 춘다. 그들의 현란한 춤사위가 끝나면 꽃봉오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되리라.
 
 불루스 음률에 맞추어 춤을 추듯 서로 다른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호흡을 맞췄다. 삶의 박자를 상대에게 맞췄다. 때론 엇박자를 치고 발등을 밟아 상대를 아프게도 했지만 결국 음악이 끝날 때쯤이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앤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국 산문> 2015.8월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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