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과제물 좀 갖다 주세요
나는 봄이 되면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린다. 지금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 물들어버린 “아빠, 과제물 좀 가져다주세요.” 라는 아들의 전화 목소리다. 나는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며 과제물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게 문도 열지 않고 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도착한다. 정문 앞에서 전화를 걸면 아들이 나와서 씽긋 웃으며 과제물을 받아갔다. 그런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 아들이 무안해할까 봐 졸업할 때까지 아빠가 심부름을 여섯 번이나 더 해야겠네….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딸 셋을 키우다가 마흔 살에 얻은 아들이라서 식구들한테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루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나하고 토론을 했다. 중학교 친구들은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갔지만, 아들한테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라고 권했다. 아들이랑 미리 점찍어놓은 고등학교에 가봤는데 마음에 들어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선도부에 들었고, 학원에 가는 문제도 본인이 결정할 정도였다. 엄마한테는 못할 말이 없어 같은 학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예쁜데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등, 심지어 몽정 했다는 이야기도 엄마한테 했다. 특히 몽정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아들이 사춘기에 들어선 모양이다고 생각 했다. 우리 부부는 사춘기를 잘 넘겨야 한다고 아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친구처럼 지냈다.
어쩌다가 컴퓨터 오락에 빠져서 끼니를 거르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 날도 퇴근해서 집에 들어왔는데, 아이가 오락게임을 하고 있었다. “너, 학원 갈 시간인데 오락하고 있냐?”라고 내가 큰소리친 것이 화를 불렀을까. 아들이 말없이 학원 가방을 챙기더니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집 열쇠를 가지고 나갔다. 전화기도 놓고 가고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친구 집에 갔거니 했다. 다음날 눈뜨자마자 아들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이랑 함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모르고 있었다. 동네 오락실에 갔나 싶어서 아들 친구더러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가게로 나갔다. 가게 문을 열고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맞는지 00 영안실에 가보라고. 그 당시 방송에서는 연예인들 자살 소식으로 어수선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늘을 원망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영안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둘러 화장터로 향했다.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들을 차에 태우고 가족끼리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내가 아이를 안고 사위가 운전했다. 내가 무작정 강변도로를 달리자고 했다. 차 안은 이따금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몇 시간을 달려도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았다. 청평을 지나서 춘천 쪽으로 한없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해가 어둑어둑해지자 낮에 날을 세우고 번득거리는 강물도 빛을 잃어갈 때 차를 멈추라고 했다. 어느 강둑에 서서 내가 흰 장갑을 낀 채 한 줌의 재를 물 위에 띄워 보냈다.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우리는 이렇게 놓아 주었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밤 12시가 넘었다. 이게 웬일인가! 현관문을 열자 꽃향기가 진동했다. 오래된 행운목이 처음 꽃을 피운 것이다. 꽃은 밤에 피었다가 아침이 오면 꽃잎이 닫히고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달여 동안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꽃이 피면 수술을 타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눈물처럼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꽃이 뿜어내는 향기에 나는 밤마다 취해 있었다. 이듬해도 꽃이 피었지만 그땐 일주일 정도 피었다가 시들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꽃이 피지 않다가 작년에 또 꽃이 피었다. 작년에 꽃이 피어서 올해는 무관심했는데, 오늘 아침 화분에 물을 주다가 아기 주먹만 한 꽃봉오리가 맺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올해도 행운목 꽃이 피네.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런가.” 그러자 아내가 달려왔다. 이파리를 손으로 제쳐가며 오랫동안 꽃대를 만지작거렸다. 행운목이 처음으로 꽃필 때가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꽃 속에서 아들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이가 떠난 날 꽃이 피었지, 꽃향기에 취해 오랜 시간 삶의 의욕조차 잃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렸더니, 도깨비한테 홀린 듯 광화문에 있는 서점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식들 뒷바라지하기에 바빴는데,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 아들과 함께 참고서 사러 책방에 들른 탓인가. 그곳에 가면 아들 또래들이 서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해서 일요일이면 책방을 찾았다. 서점에 머물면서 소설, 에세이, 시집을 들춰봤다. 어느 순간 수필가 장영희 선생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표지의 깨알만 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모조리,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표지에 소개된 글을 읽다가 책을 사서 밤새 읽었다. 장영희 선생은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장애를 안고, 세 차례의 암투병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다가 2009년 5월9일 5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박준 시인의「모래내 그림자극」이라는 시를 읽는데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창과’ 학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두 분의 삶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문을 두드렸다. 그때 59살이었다. 아내도 샘이 났는지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올해 '숭의여대 아동미술학과'에 수시 합격했다. 우리 부부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잘 견뎠다.
아들이 내 곁을 떠난 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줄 알았다. 하지만 행운목 꽃이 피면 고1 아들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빠, 과제물 좀 갖다 주세요.”라든지, 학교 정문 앞에서 아들이 웃으면서 과제물을 받아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행운목 꽃은 올해 들어 4번째 피는데 아들의 모습은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는가! 속으로 아들을 생각하며 구시렁거렸다.
“그래, 공부도 반에서 1~2등 하고, 일요일 날 나하고 근처 학교에 가서 농구 하고, 옥상에 텃밭 일굴 때 “땅이 잘 파집니까, 호박은, 상추는, 어디에 심으시겠습니까.”나를 인터뷰하며 동영상을 찍고, 새해 첫날에는 식구끼리 아차산으로 해맞이도 가고, 남대천에서 은어낚시도 했지….
한국산문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