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하나 차이
보름 동안 유럽여행을 마치고 아침 동이 틀 무렵 집에 도착했다. 집을 비운 지가 오래되어서 편지함부터 확인했다. 우편함에는 수도요금, 전기요금 고지서며 청첩장이 꽃아 있었다. 혼주 이름을 보니까 대전에 사는 친구였다. 짐을 푼 다음 친구한테 전화했다.
“둘째 딸 ‘은혜’결혼한다며? 사돈댁이 강릉인가? 먼저 축하해! 내가 해외여행에서 지금 막 돌아왔거든….”
친구는 내가 여행을 다녀왔다니까, ‘피곤할 텐데’ 하며 나를 걱정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울에 사는 내 조카가 예식장에 올 거니까 그 차로 오시게 .”하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친구 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예식장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서 나를 태우고 간다는 것이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탓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결혼식이 오후 1 시라 서둘러야 했다. 우유 한잔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집 앞으로 나갔다.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친구 조카였다. 친구네 집안 잔치 때 조카를 한두 번 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조카가 차에서 내리더니 “오랜만에 뵙네요 .”하며 나한테 인사를 했다.
“오늘 운전하려면 고생이 많겠네. 자네 혼자 가는가?”
“친척들은 관광버스 한 대로 내려갔시유, 큰아버지가 아저씨를 모시고 오라고 했시유.”
“고맙네.”
예식장에 나를 태우고 오라고 친구가 조카한테 부탁한 모양이다. 단풍철이고 토요일이라 그런지 한남대교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는데, 자꾸 하품이 나오고 졸음이 몰려왔다. 운전하는 사람한테 방해가 될까 싶어서 억지로 참았지만, 얼마 안 가서 잠에 푹 빠진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도로변에 ‘강경젓갈, 추젓’이라는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조카한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논산이유 ‘논산 강경젓갈’이 유명해유. 조금만 더 가면 ‘강경 제일교회 ’유.”
나는 ‘논산’이라는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논산은 충청도 아닌가.
“예식장이 강원도 강릉 제일교회잖아!”
“예?”
조카가 놀랐는지 말끝을 흐리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내가 청첩장을 보여 주었다. 조카가 청첩장을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어머니, 예식장이 ‘강경 제일교회’라고 했잖유. 청첩장은 ‘강릉 제일교회 ’유. 내가 ‘강릉 제일교회’라고 했잖여. 똑바로 들었어야지. 와 망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렸다. 전화 내용을 들이니 ‘엄마가 잘 못 알려주었다느니, 아들이 똑바로 안 들었다느니’ 하며 엄마와 아들이 옥신각신 다퉜다. 전화를 끊은 다음 조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 “엄마가 ‘강경 제일교회’라고 가르쳐준 대로 ‘내비’를 찍고 서울서 출발했시유.”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조카한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내 머릿속엔 “바보, 멍청이, 청첩장도 확인 안 했나?”라는 엉뚱한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생각 끝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혼주한테 전화를 걸었다 . “어이, 친구. 원주를 막 지났는데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했어. 예식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바쁘다고 서둘다 보면 실수할까 두려워서 차를 서울로 돌려야 할 것 같네.”
“차가 그렇게 막혀?”
“둘째 딸이 시집가느니 안 가느니 하더니만,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야?”
“서울에서 우체국 근무해.”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하고, 나중에 시간 내서 우리 만나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결정했다.
“조카, 뭣헌가. 차를 돌려, 서울로!”
친구 조카를 내 조카처럼 대했다. 내가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웃으면서 말하자, 조카가 운전대를 잡더니만 “아저씨 죄송해유, 죄송해유.”라고 연신 얼버무렸다. 조카가 허리를 구부려가며 말했지만, 한배를 탄 몸이라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얼른 둘러댔다. “나도, 친척 결혼식 날 말이야, 일주일이나 앞당겨서 예식장에 간 적이 있었어. 내가 수첩에 결혼날짜를 잘못 적은 게지. 조카는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날,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금방 소나기라도 한둘 금 쏟아질 듯하다가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지더군. 지금 ‘MBC정오의 희망가요’ 할 시간이네, 어서 라디오나 틀어보게.” 차 안 분위기도 살릴 겸 라디오를 틀어보라고 했다. 때마침 김명애 가수의‘도로남’이라는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웃는 사람도 /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 아 인생 /
내가 노래를 따라하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 “조카, 힘내! 강경과 강릉도, 글자 하나 차이야.”
좋은수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