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가진 건 1976년도 2월이다. 같은 과 친구 한명과 함께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공사(公社)에 같이 합격을 하였다. 합격증을 받아들고 학교 구내 우체국으로 전보를 치러갔다. 당시에는 시골에 전화도 없었기에 고향의 부모님이 기뻐하실 모습이 떠올라 빨리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다.
“어떤 내용으로 보낼까요?” 우체국 직원이 물었다.
“네, ‘00공사 수석합격’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주위사람들이 다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 학생은 어떻게 보낼까를 묻자 그 친구도 큰소리로 말했다.
“저도 00공사 수석합격이라고 같이 해주세요!”
우체국 직원은 웃으며 “그러세요. 서로 부모님이 계신 곳도 다르니 둘 다 수석합격이라고 해서 기왕이면 부모님 기분 좋게 해드리면 좋지요.” 그렇게 각자의 부모님께 전보를 보냈다.
우리는 둘 다 수석합격을 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마을입구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렸다.
“축! 아무개 씨 아들 고시 합격” 그것은 동네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시골에서 어렵게 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낸 뒤 자식을 위하여 갖은 고생을 하였는데 그 자식이 당당하게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면소재지에 있는 파출소장이 동네로 찾아와 축하한다고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변변한 직장이 별로 없었는데 삼성이나 현대같이 번듯한 직장에 합격만 하여도 집안의 경사였다. 시골의 부모님은 그런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들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해지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아들이 없으면 그 회사가 잘 돌아가지 못 한다네!”
“사장이 어려운 일만 있으면 우리아들만 찾는다는구먼!”
“우리 아들이 주무르는 돈이 수백억이랴!”
“그래서 우리 아들이 워낙 중요하고 바빠서 시골에도 잘 내려오지 못한다고!”
자식이 고향에 잘 다녀가지 않는 서운함도 그렇게 표현하고 만다.
고향의 아버지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들을 그렇게 자랑하곤 했다.
어느 아버지나 세월이 변했어도 그 마음은 똑 같은 것 같다.
1980년 대전지사에서 근무할 때였다. 같이 근무한 동기생 중에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장00군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통이 아주 좋지 않았던 먼 바다에 있는 흑산도에서 유일한 정규대학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흑산도에 계시는 섬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그의 꿈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한 뒤에 목포항 근처에 잠도 잘 수 있고 목욕도 할 수 있는 근사한 ‘여관과 목욕탕 건물’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다. 흑산도 섬에서 뭍에 나왔다가 배가 끊겨 잠잘 곳도 없어 곤란한 흑산도 섬사람들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와 그의 부모 그리고 섬사람들 모두의 꿈도 그랬을 것이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사회전반의 부조리를 개혁한다는 ‘사회정화운동’이라는 것으로 국민들을 다잡기 시작하였다.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는 부정부패를 척결한다고 누구누구를 조사하고 구속하였다는 뉴스로 가득했다. 또, 사회지도층이나 고위공직자뿐만 아니라 공직자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시시콜콜한 지침과 지시사항까지 내려왔다. 실제로 우리 사무실에서도 일요일 점심시간에 당직자가 점심을 먹기 위하여 건물 밖으로 나갔다가 상부기관의 근태점검에 걸려서 퇴직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괜히 직급이 낮은 우리가 더 겁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시간에 흑산도에서 전화가 왔다. 그 동기생 아버지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 00아! 너는 별일 없지?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아주 난리더구나. 이번 ‘사회정화운동’에 너는 해당되지 않는 거지?” 다이얼 전화기는 음질이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아서 큰소리를 질러대는 버릇이 있었다. 장00 군도 큰소리로 전화기에 대고 말하였다.
전화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져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흑산도는 섬이라 유선전화도 아니고 무선전화인데 오히려 소리가 더 잘 들렸던 것이다.
“네, 그럼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 마을 공회당에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있다. 아무쪼록 너는 나라 일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처리하도록 하여라. 여기 어른들도 다들 너는 이번 서정쇄신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단다.”
사무실의 직원들은 피식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도 며칠 전에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부모님들도 고향에서 그런 마음으로 걱정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 친구는 목포에 목욕탕 짓는 꿈을 빨리 실현시키고 싶어서 해외건설업체로 직장을 옮겨 중동지역으로 떠났다….
한국산문 20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