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새 이야기
오길순
생애 대부분을 봉제사접빈객으로 보냈을 한 종부의 삶이 방영되었다. 안동 퇴계 생가 노송정의 최정숙 종부이야기이다. 내 나이만한 칠순인데 오가는 손님들 상에 놓으려 채워진 냉장고의 한과는 정갈하고도 넉넉하기만 하다. 얼마나 오래 사랑으로 빚었으면 그리 고운 솜씨로 남았으랴.
흔히 종부는 하늘에서 낸다고도 한다. 무한 사랑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역할이라는 뜻일 것이다. 결혼이 운명이 되어 자신은 사라졌을 종부들의 삶. 그 지방 종부의 평균 수명이 다른 고장 여인보다 7-8년이나 짧다는 이야기도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시어머니는 종부였다. 여든 넷 평생에 칠십 년 가까이 종부로 사셨다. 그러고도 내게 제사를 더디 주시려는 뜻을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하루라도 늦춰 물려주고 싶었을 종부라는 이름, 명절과 제사 등 시시때때 밀려오는 형식 속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한 여인을 옭아왔을지 짐작되곤 했었다. 그래도 내게 무한 사랑으로 대해주셨던 시어머니를 떠올리면 내 역할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천명을 넘겨 30년 공직을 퇴직한 1년 쯤 후였다. 이제는 제법 나 자신을 위한 삶에 충실해졌을 때였다. 그 게 그리 큰 죄가 되었던가. 운명의 여신은 가차 없이 내 몸을 흔들어놓았다. 소백산 등정 후 귀가 길에 당한 자동차충돌은 멀쩡했던 나를 썩은 사과처럼 만들어버렸다. 석 달 열흘 입원 후에도 뇌진탕 후유증으로 시달릴 즈음 그토록 사랑해 주셨던 시어머니도 급히 떠나셨다.
경산지방의 규방민요에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새하나 할림새요 시누하나 뾰죽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 라는 구절이 참으로 구구절절하다. 그럼에도 꾸중새는 커녕 사랑새처럼 아껴준 시어머니가 계시어 인간살이 잘 견뎠던 것 같다. 하향하면 동네 아낙들을 방안에 모아놓고는 벅찬 듯이 말씀했다.
“나는 우리 큰 며느리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네” 그 과분한 뜻이 무엇일까? 수십 년 후 아들이 가정을 이룬 후에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들과 살아준 며느리가 고마워서, 혹은 종부의 대물림이 딱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너는 나만 보면 버선발로 뛰어오느냐”며 반갑게도 손을 잡던 시어머니. 평생 그리 감싸주실 줄 알았던 분이 사나흘 앓다 떠나셨을 때, 단 하루 맘껏 효도하지 못한 것이 애석했었다. 정갈하고 넉넉했던 그 분의 솜씨 또한 잇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시어머니는 절구에 쌀을 빻아 제사떡을 했다. 손수 술을 빚고 짚재를 섞어 콩나물을 길렀다. 동네 큰 일 때마다 두루마기며 수의까지 짓던 솜씨장이였다. 산지기처럼 벌초까지 하며 지켜낸 선산 묘소. 칠십년 종부의 일생에 한마디 원망이 없으셨을까만 내색조차 아니 하셨다.
제상은 늘 푸짐했다. 이곳저곳 나누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식혜며 전이며, 절이고 말린 생선을 몇 바구니 쪄 낼 때 아궁이 앞에 앉은 나는 들기름 냄새만으로도 풍요로웠다. 장독과 광과 우물을 달리기 선수처럼 오가던 시어머니. 음식을 태울까, 식혜 불이 넘칠까, 찌걱거리는 고무신을 비틀거리며 부뚜막에 한 발 올리실 때, ‘아이고!’ 소리는 생의 외마디가 아니었을까?
더불어 가족들은 늘 둘러앉아 밥상을 맞았다. 설거지도 마당 쓸기도 시어머니 몫이었다. 때로는 측간의 오물처리도 망설이지 않았다. 불 잡으랴, 홰 잡으랴. 논밭으로 산으로 궂은 일 다 챙겨낸 여인의 일생,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끝이 없어라.
홀로 남으신 시아버님을 모셨을 때였다. 어른 섬기기로는 누구 못지않다고 여긴 나였지만 반신이 어려운 시아버님을 모시는 일은 ‘바람벽’ 타기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때 마침 날마다 교통사고후유증을 수액으로 달래면서 ‘바람벽’을 탈 때마다 이것이 수행이다, 싶었다.
장남도 안 된다며 결혼을 말리던 친정어머니가 종손부일 줄 알았더라면 내게 무어라 하셨을까? 그럼에도 며느리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던 사랑새 같은 시어머니와 함께 했던 내 생애는 참으로 헤아릴 길 없는 축복이기만 하다.
(마음의 양식, <<행복의 나라로>> 국방부. 2018.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