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다이노사우르스
김단영
벼가 노랗게 익어 황금 들판이다.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 빛깔마저도 붉어지는 가을이다.
“공룡 알 싣고 가는 기사인데요, 어디로 가면 되죠?”
네? 뭐라고요? 분주한 월요일 아침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에 황당할 뿐이었다. 무슨 알이라고요? 공룡 알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벼는 사람이 먹고, 볏짚은 소가 먹는 양식이 된다. 추수를 끝낸 볏짚을 사일리지(silage)로 말아놓은 곤포를 두고 축산농가에서는 ‘공룡 알’이라 불렀다. 하얀 비닐로 래핑(wrapping)한 덩어리를 멀리서 볼 때면 마시멜로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곤포 사일리지 판매업자가 공룡 알이라고 부르니 그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는 호남 지방이다. 공룡 알 만들기 작업은 주로 쌀 생산이 많은 평야에서 이루어졌다. 볏짚 사일리지를 실은 기사는 대부분 전라도에서 출발했는데 가끔 경기도 평택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화물차에 실린 공룡 알은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운임이 추가되어 제 몸값을 올렸다. 볏짚을 거두지 않고 논바닥에 썰어 넣는 농가도 더러 있다. 사일리지를 만들어서 받는 지원금이나 거두지 않고 받는 지원금이 엇비슷하여 농부들은 애써 볏짚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애가 타는 쪽은 언제나 구매하려는 축산농가 쪽이다. 그래서 볏짚 작업단이 수요와 공급의 거래를 조절하며 판매업자로 나섰다.
옛날에는 농가마다 소를 키우면서 논농사도 지었기 때문에 볏짚이 자급자족되었지만, 요즘은 분업화가 이루어져 농업과 축산업이 별개로 구분되는 실정이다. 축산 규모도 점점 커지다 보니 겨울철 가축에게 먹일 볏짚 구하기는 축산농가의 주요한 월동준비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으면 가격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우리 영농조합에서는 대가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축산농가를 위해 조사료(粗飼料)를 구매해 주거나 판로를 알선해 주고 있다.
일터 주위는 온통 논과 밭이다. 일하다가 콤바인 소리가 요란하여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가을걷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호미와 낫으로 농사를 지었다면 현재는 농기계 없이 농사 짓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순자(荀子)》에서는 일 년 농사를 간단하게 ‘춘경하운 추수동장(春耕夏耘 秋收冬藏)’이라고 했다.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이를 저장한다는 뜻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농사의 순서에는 변함이 없지만 농사짓는 기술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밭을 가는 봄부터 트랙터의 사용은 보편화된 지 오래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물들고 산꼭대기에서부터 단풍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을 정취에 빠져들 새도 없이 추수가 시작되었다. 콤바인 기계 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들판을 가득 메웠다. 억대를 호가하는 농기계를 집집마다 장만하긴 힘들어 기계를 가진 사람만 공연히 바쁘다. 콤바인이 없는 소농가는 자신의 순차가 돌아오길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가을비라도 올라치면 조급증은 더해진다. 기계를 논으로 들이려면 귀서리의 벼를 낫으로 베어 내야 한다. 콤바인 작업할 때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미리 벼 베기를 해 두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준비는 일찌감치 마쳐 놓고 대형 농기계를 가진 볏짚 작업단을 기다린다.
가을의 하루는 몹시 번다하여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콤바인은 논의 가장자리부터 직진하며 벼를 벤다. 흡사 바리캉으로 머리카락 밀 듯 한다. 앞에서 예취하고, 옆구리에서 탈곡한 후 꽁무니로 볏짚을 내뱉는다. 여러 사람이 해야 할 노동을 순식간에 해결해 주는 셈이다. 탈곡한 벼는 가을볕에 며칠을 내다 말리거나 곡물 저장고에 담아 건조장으로 이송한다. 볏짚도 뒤집어 가며 말린 후에 베일러로 모아 원형으로 압착시킨다. 다음은 곤포기를 이용하여 흰색 비닐 여러 겹을 감아 단단히 포장한다. 볏짚은 곤포 사일리지 안에서 발효되어 반추동물의 좋은 먹이가 되어 준다.
기계의 힘은 참 대단하다. 마을 주민들이 일제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달 이상을 꼬박 품앗이로 고생해야 가능했던 가을걷이가 기계 몇 대를 부림으로 속전속결이다.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지만 기계가 고장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을비가 참아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 가을이다. 농가의 가을은 텃밭에서도 부지런하다. 주말이면 바쁘게 움직여 서리가 오기 전에 고구마를 캐고, 고춧대를 뽑아 갈무리해야 한다. 감도 홍시가 되기 전에 따야 하고, 알밤도 줍고 떨어진 모과도 주워야 한다. 모과를 썰어 차(茶)로 만들어 두면 겨울철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아, 가을이 깊어 간다. 가로수 낙엽이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나무들도 한 겹씩 계절의 옷을 껴입는다. 일주일 내내 분주하게 작업하던 콤바인은 겨울이 오기 전에 끝을 내야 한다. 추워지기 전에 일을 마치려고 서두르느라 밤중에도 작업등을 켠 채 포효하고 있다. 캄캄한 밤에도 건초 베일러가 콤바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볏짚을 모아 곤포 사일리지를 만들어서 툭 떨어뜨린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추수가 끝난 논마다 공룡 알이 대여섯 개씩 쏟아져 나와 있다. 간밤에 작업한 가을이 낳은 공룡 알이다. 그래서 가을은 공룡이다.
-수수밭길 동인지3호 《맑은 날, 슈룹》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