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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유산    
글쓴이 : 김단영    19-05-24 11:40    조회 : 3,629


어머니의 유산


김단영


 기억에 남는 광고 멘트가 있다. 부모님이 물려줄 게 없다더니 고혈압을 물려주셨다는 어느 보험회사의 광고였다. 어성초 차를 끓일 때마다 TV광고 멘트가 생각나 웃곤 한다. 그 광고를 패러디한다면 시부모님은 우리에게 ‘어성초(魚腥草)’를 물려주셨다. 어성초란 식물분류학에 따르면 삼백초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으로 《한국백과사전》에는 ‘약모밀’로 되어있다. 약모밀이라는 이름 말고도 중약초, 즙채, 십약, 취령단 등의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어성초는 해독과 청혈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항암작용에서 피부미용까지 두루두루 약효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 여기저기 어디 안 좋은 데가 없다보니 가히 만병통치약이라 할만 했다. 물론 고혈압에도 좋다. 특이한 점은 생선 비린내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다. 그 비린 냄새가 역겹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고 좋았다. 그냥 생풀을 뜯어 먹어도 거슬리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어성초의 번식력이 워낙 강하다보니 어떤 이는 한낱 잡초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신이 주신 귀한 약초’라며 애지중지 아꼈다. 탈모치료와 아토피 피부염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어성초는 어느 날 갑자기 대박상품이 되었다. 건조된 어성초와 녹차, 자소엽(紫蘇葉)을 넣고 담금주를 부어둔다. 3개월간 숙성시키면 자연발모제가 된다고 하여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어성초’하면 바로 우리 집을 찾을 정도로 꽤 오래 전부터 우리는 어성초 재배를 해왔다.

 쌀농사보다 수입이 낫다는 소리에 1990년대 초반부터 어성초 뿌리를 구해다 심었다. 동네사람들도 돈이 된다면 너도나도 재배해볼 심산으로 우리 어성초 밭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아버님은 《어성초 건강법》이라는 책을 구해 읽으며 약리작용에 대해 공부하셨다. 책 속에는 세상에 어성초보다 귀한 약초가 없다며 ‘기이한 약초’라고 적혀있었던 모양이다. 한 장씩 읽을 때마다 어성초 예찬을 쏟아 내시곤 했다.

 600여 평이나 되는 어성초 밭의 풀 뽑기는 오롯이 어머님의 몫이었다. 어머님은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곧장 밭으로 가셨다. 이른 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풀을 뽑고 또 뽑았다. 미숫가루나 식은밥 한 덩이로 점심을 대충 때운 후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 열기를 식혀갈 즈음엔 또 밭으로 나가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밭을 매곤 했다. 어머님은 날마다 어성초 밭에 몸을 구푸려 붙어살다시피 했다. 고구마 잎처럼 생긴 어성초는 그렇게 어머님의 땀방울을 먹고 자랐다.

 쌀농사를 짓던 논에다 심어서 그런지 논 풀과 밭풀이 종류별로 다 올라왔다. 아버님은 손수레로 소똥을 퍼다 날랐다. 거름이 좋아 풀들도 덩달아 쑥쑥 자랐다. 아버님은 탈장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터라 무겁고 힘든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무그늘에 앉아 어머님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메밀처럼 자라는 줄기는 어머님이 토해내는 숨소리에 키를 키웠다. 비가 오는 날에도 풀이 잘 뽑힌다며 밭에 나가시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뿌리는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어성초 줄기는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수확했으며 뿌리는 3년마다 밭을 갈아엎어 캐냈다. 드디어 뿌리를 캘 차례가 왔다. 뿌리를 판매했던 분이 농사만 잘 지으라며 수확하면 본인들이 책임지고 전부 사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는 동안 거래업자의 마음은 바뀌었고,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중국산 약초가 밀려 들어왔다. 피땀 흘려 키운 어성초를 헐값에 넘기자니 속이 상했다. 그 무렵이었다. 아버님은 왕성하던 식욕을 잃고 말았다.

 팔순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소화력도 좋았고 청년 못지않은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어성초를 한낱 풀 값에 팔려하니 속이 상해 탈이 났나보다 생각했다. 당신 스스로 ‘떡 반죽 그릇의 복’을 받았다 하시며 참잘 드셨는데 며칠이 지나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암이라며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다. 자식들은 깜짝 놀랐지만 어머님은 침착했다. 입원을 하게 되면 하루 이틀 만에 돌아오기 힘들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라며 어성초를 마저 다 캐서 실어 보냈다.

 농사지은 품값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으나 어성초를 팔아 푼돈을 쥐고 부산으로 향했다. 고신대학병원에서 하루 종일 검사를 받고나니 위암이 아니라 위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어성초 밭으로 돌아왔다. 어성초 덕분이었는지 아버님은 93세까지 장수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성초 밭을 팔게 되었다. 어머님이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아버님의 건강도 쇠약해지는 것 같아서 부동산에 내놓고 말았다.

 동네사람들도 어성초 재배가 돈이 되지 않음을 눈치 챘고, 필요하면 우리 밭에서 얻어 가면 그만이었다. 부모님을 고생시키던 밭은 팔렸지만 어성초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았다. 집터가 넓어 집과 마당을 빼고도 족히 200평은 됨직한 텃밭이 있었는데, 어성초는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는 판매업자에게 넘기지 않고 집에서 가공해보기로 했다. 줄기를 베어다 말리기도 하고, 날 것으로 설탕에 재워 엑기스를 만들기도 했다. 엑기스 한 방울은 어머님의 굽은 등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었다.

 생으로 즙을 낸 후 올리고당을 섞어 발효시켜 보기도 했다. 말린 어성초로는 주로 차를 끓여 마셨는데, 말리면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바싹 마른 어성초는 가루를 내어 환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농사지은 보람도 있었다. 생풀을 자주 얻어가시던 분이 암이 나았다며 찾아온 일도 있었다. 뿌리의 약성이 제일 좋고, 그 다음에 꽃폈을 때 줄기가 좋고, 가을에 올라와 꽃을 피우지 못한 줄기도 햇볕에 말려 차를 우려 마셨다. 간혹 가을에 미처 거두지 못한 어성초 줄기는 황갈색으로 낙엽이 되어 졌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싹을 올렸다.

 어머님은 조용히 황갈색 낙엽으로 졌다. 남는 것에 대한 염려는 하셨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으셨다. 다인실 병실에서 금방 약봉지를 건네고 나간 간호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냥 주무시듯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70년 동안 살았던 집을 팔고 읍내 가까이 이사를 했다. 나무도 몇 그루 옮겨 심었고, 어성초도 한 줌 뽑아다 축대 아래 묻어두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어성초는 어머님이 환생하듯 돌 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해마다 줄기만 조금씩 베다 썼는데, 올해는 남편과 어성초 농사를 좀더 넓게 지어보기로 의논했다. 뿌리를 캐서 골골이 심었다. 이제 밭에 엎드려 풀을 뽑는 일은 내 몫이 될터다. 밭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풀을 뽑다보면 다리가 저리고 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햇살에 등허리는 따뜻할지 몰라도 얼굴엔 기미, 주근깨가 잔뜩 올라올 테지. 작정하고 물려주신 것은 아니지만 어성초는 어머님의 유산이 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흙 묻은 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큰 소득도 없으면서 약성이 좋은 풀이라는 이유로 나는 또 어성초에다 시간과 땀을 기꺼이 바칠 것이다. 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한국산문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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