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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피가 준 선물    
글쓴이 : 윤기정    19-07-14 10:17    조회 : 4,235

 

    와이피가 준 선물

 

윤기정

와이피  

와이피(YP)는 경기도 양평의 영문자 이니셜이자 손자의 태명이다.  

정년퇴직한 뒤 양평읍 변두리에 남향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잡았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가운데 두고 십여 호의 집들이 마주 보는 작은 마을의 끝이자 맨 윗집이다. 남쪽으로 전망이 트여 시원하다. 울안에 작은 텃밭도 마련했고 집 뒤로는 밤나무, 찔레, 아카시아와 잡목 우거진 야산이 남아 아쉬운 대로 전원주택의 맛도 난다.  

아들 내외가 부모들이 거처하는 양평을 생각하여 태명을 와이피로 한 모양이다. 아니면 양평서 잉태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물은 일은 아니다. 뭔가 부모와 연결 짓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아내도 그런 눈치다. 서울을 떠난 이유 중의 하나가 손자가 생기면 층간 소음 걱정 없이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지낼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도 있었으니 잘 지은 이름 아닌가!   

 

금연  

재작년 8월. 주민을 대상으로 혈관 나이 검사를 해준다고 해서 아내와 함께 보건소를 찾았다. 현관에 들어서니 금연 클리닉 배너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을 보자 얼마 전 며느리가 “아버님. 저 애기 가지면 담배 끊으실 거죠?”라고 묻기에 얼른 그러마고 약속했던 일이 떠올랐다. 진작부터 금연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기에 쉽게 약속을 했었다. 아내는 혈관 검사하러 가고 나는 금연 클리닉으로 올라갔다. 상담 뒤 금연 패치 몇 장과 금연용 도구 몇 가지를 받았다.   

금연 패치는 니코틴을 약하게 보충해서 금단 현상을 줄여준단다. 어차피 며느리와 약속한 금연, 아직 소식은 없지만 꼭 그때까지 기다려서 끊는 게 어른스럽지 못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기로 한 바에야 의지만으로 끊기로 하였다. 그 날로 50년 지기 담배와 미련 없이 갈라섰다. 일주일 분 금연 패치는 다음 주에 반납하였다. 그로부터 달포쯤 지난 추석 무렵에 애기가 들어섰고 태명을 와이피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한 지 4년, 아이 가지려 노력한 지 2년 만의 축복이었다. 금연이 빨랐으면 손자도 빨리 생겼을까? 양가 온 식구의 행복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준비  

같이 살날이야 길수록 좋겠지만 뜻대로 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글로 남기자. 할아비의 삶의 흔적이 먼 훗날 혹 와이피의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글쓰기를 위한 준비로 텅 빈 머리와 메마른 가슴부터 채우고 적셔야 했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잃었던 순수함부터 찾기로 했다. 지난 해 1월부터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들과 교유하며 부족함을 찾아 메운다. 따뜻하고 넉넉한 시선을 길러서 세상을 바라본다. 도반이 있어서 힘이 되는 길에 들어섰다.  

 

배냇저고리  

며느리의 배가 표시 나게 차오르면서 아내가 배냇저고리를 짓기 시작했다. 옷 짓기를 좋아하거니와 손이 재고 꼼꼼하여 제법 볼 품 있는 옷이 나왔다. 손자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더하여 한 땀 한 땀 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빚고 짓는 일은 별나게 잘하여 드러내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유월 초순, 아들 생일에 다 지은 배냇저고리와 집에서 빚은 백수환동주(白首換童酒)를 쇼핑백 안에 함께 넣어서 가져가다가 병뚜껑이 덜 잠긴 바람에 술이 새서 배냇저고리 앞섶에 점점이 노란 술 빛 물이 들어버렸다. 세탁한다고 원상 복구가 될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부득이 한 벌 더 지어야 했다. 나중에 먼저 것이 표시 나지 않게 세탁이 잘돼서 두 벌이 되었으니 와이피는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손수 지은 옷이 두 벌이나 되었다.  

 

태교  

입덧으로 고생하면 본인은 물론 곁에서 보는 이들도 안타깝고 힘든 일인데 며느리는 입덧도 안 하고 임신 내내 골고루 음식을 잘 먹었다. 와이피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다. 태교 음반과 책을 사서 교장 승진 때 제자들이 선사한 CD플레이어와 함께 며느리에게 보냈다. 열심히 듣고 뱃속의 와이피와 마주 보며 얘기하듯 대화하고 태교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불과 이삼십 년 전 만해도 노산이랄 나이인데도 든든하고 대견하여 순산을 예감하였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안사돈이 딸에게 좋은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집사람도 신선한 과일이며 채소를 대느라 바쁜 눈치다. 외아들 외동딸 내외이니 그 어머니들의 애씀이 측은할 정도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귀한 이는 조금 늦게 나타난다던가. 만날 날이 지났다. 허기야 와이피가 정한 날짜도 아니니 야속할 것도 없다. 다만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산모가 힘들다고 하니 그게 걱정이었다. 많이 늦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몸은 가냘프지만 발레로 다진 몸이라 초산치고는 무난히 출산했단다. 예정일에서 나흘 지난 아침. 와이피는 드디어 세상에 나와 우주의 중심에 자리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격대교육(隔代敎育) 책자를 준비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저녁 면회 시간에 세상에 존재하는 와이피를 처음 만났다. 제 아비가 세상에 태어난 날의 모습과 똑 닮았다. 그런데도 아들을 처음 만난 날과는 분명히 다른 기분! 다른 감정인데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이 귀한 선물을 만난 환희가 조금 가라앉은 뒤에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선물  

작명법을 배운 아내가 진작부터 이름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항렬자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사주, 관상, 풍수, 명운 등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나는 몇 걸음 비켜서서 지켜보기로 하였다. 다만 부르기 쉽고 맑은 느낌의 이름이면 좋겠다. 며칠 후 배냇저고리를 입고 잠든 와이피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왔다. 잠든 와이피를 들여다보고 있을 며느리와 아들의 미소와 사랑 담뿍 담은 눈길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와이피는 가족들에게 ‘행복’이라는 선물을 먼저 보내고 스스로 선물이 되어 가족이 되었다.  

 

《한국산문》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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