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단짝
김기수
종로3가역 6번 출구에서 골목길 단짝과 만난다. 매주 목요일 약속된 시간 12시 40분에. 식당과 메뉴는 카톡으로 만나기 전날 혹은 당일 아침에 정한다. “오늘은 뭘 먹을까?” “음, 소고기국밥.” “아하, 내일 그곳에서 보세.” 메뉴를 바꿔가며 식사하는 재미가 다양하고 쏠쏠하다. 종로 칼국수, 비빔국수, 순대국밥, 김치찌개…. 종로3가 뒷골목 식당에서 점심에 곁들여 반주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가곤 한다.
오늘은 여느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카톡!’ 하는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선약이 있어 점심을 같이할 수 없구나. 미안.” “으음, 그래.” 일단 혼자서 맛집을 둘러보기로 한다. 종로3가에 도착하기 한두 시간의 여유를 생각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오늘은 뭘 먹을까?’ 평소와는 다른 마음으로 종로3가역에서 내린다. 혼자만의 점심을 생각하면서 6번 아닌 다른 출구를 선택한다. 5번 출구다. 일명 ‘송해길’이라 불리는 낙원상가 주변이다.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상갓집 개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낯설지 않은 식당 이름 ‘번지 없는 주막’에 자리하고 앉아 들깨 우거지탕과 소주를 주문한다. 대낮의 흥취를 즐기며 추억의 뒤안길을 더듬는다.
옛 추억이 젖어 있는 약수동 골목길로 시간이 흘러간다. 골목길 단짝과 서로 다른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어린 시절부터 골목길에서 함께 놀며 지냈다. 집안 환경은 많이 달랐지만 둘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천진난만한 골목대장이었다. 씨름이나 운동은 동네 아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공부도 그랬다. 공부나 놀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둘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사이가 뜸해졌다. 중학교 입학과 관련한 경쟁의식과 이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부러움과 질투가 둘 사이에 비집고 들었던 것 같다.
전국적으로 연합고사를 치르고 받은 점수에 따라 중학교를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단짝은 공립 중학교를, 나는 국립 중학교를 지원했다. 지원한 학교 합격선이 저녁 신문과 라디오 뉴스에 나왔다. 예상 합격선 점수로는 둘 다 합격이었다.
다음날 아침 단짝 친구가 문을 두드렸다. “합격선이 다르게 나왔는데 넌 어떠냐?” 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단짝은 합격하고 난 낙방을 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었다. 단짝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나를 슬프게 했다. 대문을 닫고 들어와 2점 차의 희비쌍곡선이 나를 울게 했다.
그때부터 둘은 만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친구는 신설동 근처에 있는 학교로 버스 통학을 했다. 나는 왕십리에 있는 정원 미달 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걸어 다녔다. 버스 타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대학도 걸어 다녀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추억이라 생각된다. 단짝은 키도 커서 교복 입은 모습이 훨씬 멋있어 보였다. 반짝이는 모표 달린 모자는 더욱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단짝이나 또래 아이들과 마주치기 싫어 학교도 골목길로만 다녔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중학교 낙방이 내 인생에 있어 최초의 실패였다. 빡빡 깎은 머리에 멋없는 검은 교복은 중학 시절 나를 우울하게 했지만, 더욱 분발하려 마음을 다잡던 시절이기도 했다.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
우울한 중학교 생활은 다른 한편 새로운 모습의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읽는 재미에 빠졌다. 나약하던 나를 인식하는 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단짝의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단짝은 나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성숙해 보였다. 가끔 단짝과 만나면 책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다.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난다. 알은 세계이다. 새로 태어나려는 이는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친구인 데미안을 동경하면서 그를 닮으려고 하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자각해 가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과정을 그린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데미안(Demian)》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품 속 싱클레어는 나였고 단짝은 데미안이라 생각했다. 둘은 이처럼 자기 내면에의 길을 찾으려 모색하며 지낸 시기였다.
중학교 말 나에게 또 한번 성숙의 계기가 찾아왔다. 골목길을 연하여 이어진 비탈길에 대학생 때까지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집이 있었다. 그 여학생의 집을 지날 때면 언제나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노래와 휘파람으로 <그 집 앞>을 불러대며 다닌 기억이다.
단짝은 그 여학생의 초등학교 남동생을 고등학생 때 가르친 과외선생님이다. 단짝으로부터 여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O숙(淑)’이라고. 또한, 초등학교 후배였음도 알게 되었다. 지금 그 여학생은 손자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짝사랑의 꿈은 세월과 더불어 까마득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등학교 입시 전기에 응시하여 실패했던 단짝과 또 낙방한 나는 한 번 더 실패를 맛보았다. 골목길 단짝인 우리는 아프락사스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려고 방황하고 발버둥 쳤다. 남산 중턱에 앉아 나누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의 아픔과 정열을 안고. 그 후 어려운 길도 걷고 실패의 길도 있었지만, 단짝은 언제나 나보다 한걸음 앞섰다. 단짝은 S 교대에 진학해서 후진 양성과 교육자로서의 삶을 택했다. 뒤이어 나 또한 남산에 자리한 D 대학에 재수한 뒤 입학해 국문학도가 되어 교사의 길로 나갔다.
5월의 거리가 나날이 푸르름을 더해간다. 어디선가 싱그럽고 배릿한 풀냄새도 끼쳐온다. 단짝과의 만남은 설렘과 열기를 동반한다. 종로3가 골목길 이름난 식당에서 비빔국수에 옛 추억을 비비고 한 잔의 추억도 털어 넣는다. 이번에도 한발 앞서간 단짝 친구가 소개하여 함께 다니는 수필교실로 향하는 골목길 바람이 따뜻하게 감겨온다. (한국산문 2018. 5월호 등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