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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에게 가는 길    
글쓴이 : 진연후    19-07-29 23:38    조회 : 3,774

그대에게 가는 길

진연후

그대를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며, 설렘으로 가슴 뛰는 날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일상에 지치고, 사람들에 부대끼

며 마음이 지칠 때마다 당신이 떠오르기도 했지요. 그대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여러 가지 번거

로움도 있고, 고통을 참아야 하기도 하며 시련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동행은

 그리운 당신을 닮은 친구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에 대한 기대는 지쳐있던 몸을 추스르게 하고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합니다.

거림에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거림에서 세석까지는 6km로 오르는 건 보통 서너 시간을 잡더군요. 거대한 숲으

로 뒤덮인 골이라는 거림은 역시 들어서자마자 삼십 도를 훨씬 웃도는 도시의 기온을 무색하게 합니다. 계곡의 물

소리가 시원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도 지나갑니다. 친구와 둘만의 길은 시간도 마음도 여유로워 물을 만나면 잠시

 멈추어서 손을 담그기도 해 봅니다. 친구는 얼음물을 준비하여 차가운 손수건과 함께 건네줍니다. 늘 그렇듯 고마

운 마음의 표현은 그저 웃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거림에서 세석까지 오르는 동안 이정표를 한 번밖에 보지 못했습

니다. 2.4km 지점에서. 참 인색하다 했더니 친구가 말합니다. 다 비우라는 거겠지.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

지,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그저 다 비우고 오르라고. 맞네요. 한발 한발 오르다보면 도착하겠지요. 숫자가 뭐 그리

 중요하다구요. 우리에겐 아직 힘이 남아있고,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건데요.

오르는 동안 친구는 몇 발짝 앞서 가며 미끄러운 곳, 위험한 곳을 알려주고 힘들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그리고 한

 번씩 들꽃과 나무와 하늘을 이야기합니다. 때론 자신을 돌아보며 혼자 오르는 길이기도 하지만, 둘이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으니 참 좋은 길입니다. 한참을 오르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몇 발짝 앞에서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카메

라를 들어 보입니다. 지친 표정을 담아 보겠다네요.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가빠오는데 가슴 속에서는 꼬물꼬

물 행복이란 단어가 부풀어 오릅니다.

드디어 2시간 40분 만에 세석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묵을 곳입니다. 전에는 비박도 가능했는데 이

젠 미리 산장을 예약하지 않으면 당신 품에서 잠들 수 없네요. 성수기 때는 인터넷 예약이 몇 분 만에 끝난다니 당

신을 찾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랍니다. 장터목 산장에서 숙박을 해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는데 이미

 예약 마감이라서 세석을 예약하게 되었어요. 세석 평전은 유월 초 철쭉이 만개할 때 절경을 이룬다지만 전 어떤

모습이든지 반갑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는데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네요.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 변화에 놀라지만 그것 또한 당신의 매력이

지요.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듯 하면서도 시시각각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당신. 산장 1호실 창가에서

밖을 봅니다. 어느새 소나기는 지나가고 저녁 세수를 마친 말간 모습의 나무들이 창 가득 들어오네요. 시간이 잠

시 멈춘 것 같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적응이 힘든 느림보는 이쁜 그림 엽서처럼 정지되어 있는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합니다. 잠자리들이 날고 작은 들꽃이 피어 있네요. 당신 품에선 하늘 빛이며 바람이며 모든

 게 신비롭게 느껴져요.

산장에서의 하룻밤.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고 밖에 있는 몇몇의 소근거림도 잦아드니 어둠과

 함께 고요함이 내려앉습니다. 아직은 초저녁 별이 듬성듬성 보일 뿐이지만 어둠이 깊어질수록 별빛은 더 가까워

지고 짙어지겠지요. 제가 주는 선물이라고, 아름다운 걸 함께 보고 싶은 제 마음을 슬쩍 담아 당신이 준비한 것들

로 친구에게 생색을 냅니다. 제 유치함에 익숙한 친구는 무심하게 넘기네요. 저녁 아홉시 소등을 한답니다. 자리에

 눕기 전 잠시 친구에게 지난 봄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우울했던 시간을 털어 놓습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친구도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제 마음을 치유해 줍니다. 속을 다 보여도 불편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

게 와 있기 때문이지요. 잠이 드는가 싶다가 깨어보니 열시 삼십분,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말짱하게 깨어있는 친

구와 세시 삼십분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엔 별이 가득 찼네요. 누군가 살짝 뿌리려다 실수로 왕창 쏟아놓은 것처럼. 조금은 힘겹게 찾아와야 하고 약간

의 불편함쯤은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게 주는 당신의 선물 같아요. 작은 랜턴 불빛만이 발밑의 어둠을

간신히 밀어낼 뿐 당신은 아직 깨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고요한 어둠 속의 산길은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한 걸음 한 걸음에 마음을 담아 봅니다. 앞만 보고 오르다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

 꿈 속 어딘가에 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아도 부끄럽지 않고, 아쉬움이 남지 않는 흐뭇한 여

정은 여기서만 가능하지 싶습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가는 동안 서서히 날이 밝아옵니다. 천왕봉에서 일출 보기를 포기한 대신 아름다운 지리산을

 천천히 느끼기로 했습니다. 오르면서 나무 하나하나 눈맞춤을 하고 고사목 앞에서는 잠시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모두가 있어야 할 곳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나무가 다르게 생겼다고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을 만나면 그렇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천왕봉에 올라 당신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봅니다. 어슷하게 비켜서 이어진 능선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한 바퀴를 돌

아가네요. 수많은 봉우리들이 앞뒤로 각자 위치를 잡고 구름을 허리에 걸치거나 아예 몸은 다 내주고 섬처럼 봉우

리만 떠 있기도 하다가 바람의 간지럼에 흩어지는 구름을 보며 웃는 모습이 한없이 지켜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

을 것 같습니다. 그 봉우리들이 하늘과 맞닿게 되는 곳까지 푸르름의 빛깔은 어쩌면 또 저리도 다양한지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을 마련해 놓은 당신은 인간의 감각과 기억의 한계를 보여 주지만 당신의 품 안에 있다는

 충만함을 깊이 느끼게도 합니다.

당신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고 주어진 것에 순응해야 하지요. 누군가를 제치고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만 많

이 누리겠다고 욕심낼 것도 없으니 이 자리에 서면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이 순간, 그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

습니다. 산과 하늘만이 가득한 곳, 온 몸을 휘감아 도는 바람 한가운데 서 있다는 느낌이 도시의 지루함을 견디게

 하겠지요. 굳이 목을 뒤로 젖치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가까이 보이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곳에서 두 팔

을 벌리고 심호흡을 하면 당신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어울릴 수 있는 용기를 조금쯤 슬쩍 가슴에 안겨 줍니다. 제

게 당신은 쉽게 만날 수 없지만 만날 때면 늘 새롭게 반겨주는, 그리고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당신 앞에서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아무 문제없고, 두 발로 걸어서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 전부이지요

. 때때로 일상조차 버거워하며 허덕이는 제가 그나마 제 한 몸 추스르며 사는 건 그리운 당신을 가슴에 품고 사는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친구가 보내 준‘2010년 연후의 지리산’영상을 보니 만나기 전의 설렘과 가슴 가득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지

금 제게 가장 아름다운 그대가 지리산이라는 이름이었다면 이제 다시 만나러 갈 그대는 어떤 이름으로 다가올까

요. 그 이름이 무엇이든 또다시 설레며 준비하고 조금 늦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그대에게 가

는 길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한국산문. 20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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