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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와노병    
글쓴이 : 이원예    19-08-07 16:21    조회 : 2,673
 가을 산행에서 억새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귀한 손님을 마중하는 마음으로 잘 닦인 길은 비워두고 일부러 가장자리 흙을 밟으며 걸었다. 하늘이 한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오고, 길가에 핀 야생화는 출가하는 수도승처럼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이며 알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아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산기슭 양지에 군영을 이루고 있는 억새는 화려하다. 은빛 갈기, 숫돌에 벼린 장도처럼 푸르고 날이 선 잎, 촘촘히 달린 부채꼴의 꽃차례는 위세가 대단하다. 바람이라도 불면 성근 억새들은 은빛보료를 펴기라도 한 듯 장관이다.
봄날, 꽃이나 나무의 새싹은 안쓰럽고 곰살갑다. 그런데 억새는 새싹을 피울 때부터 여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원래가 튼실하고 자생력 강한 삶이 억새의 일생 아닌가. 꺾이고 엎어진 줄기위에 뿌리가, 그 뿌리위에 흡사 갈퀴처럼 또 뿌리가 엉켜있어 마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군가 한 대목이라도 읊조릴 기세다. 아무래도 억새는 억세다.

 늦은 가을, 억새의 집성촌에 쇠락한 기운이 만연하다. 풀기 뺀 무명천이라도 풀어 놓은 듯, 저무는 산자락에 빛바랜 한삼자락이 한바탕 군무로 이어진다. 늦가을의 시린 하늘, 저무는 해. 윤기 없는 억새의 춤사위는 덧없이 쓸쓸하다. 수분이 사라진 억새 섶은 그대로 마른 가르마를 드러낸다. 은빛물결로 흐르던 갓 털의 반짝임은 간곳없고 타놓은 솜처럼 푸석하다. 소지燒紙 날려 보내듯 훌훌 떠나간 씨앗 탓 일게다. 품안의 자식 애써 키워 놓았더니 제 살기 바빠, 가끔 한번 요양원 찾는 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보는 듯하다.

 전성기의 억새가 거침없이 진군하는 군인이라면 지금 보고 있는 억새는 외롭고 쓸쓸한 백발의 노병이다. 마치 삶이라는 전장에서 퇴역을 앞둔 아버지처럼. 아버지를 좀 자주 찾아뵈라는 남동생의 질책에 요양원을 찾았다. 6.25와 월남전, 한때 나라의 운명을 짊어졌던 초병들이 칠, 팔십대의 노병이 되어 묵고 있는 보훈 요양원이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누워있거나 휠체어, 부축을 받아 움직이는 노인들을 보면서 마른 대궁이, 티끌처럼 푸석하던 억새의 형상이 스쳐지나갔다.

 “아버지 저희 왔어요.” “오냐!” 영혼 없이 짧게 한마디 하시며 겨우 눈을 뜨셨다. 바람 앞에 이리저리 뒤척이던 억새처럼 외롭고 쓸쓸함이 묻어나는 대답이다.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나는 아버지의 어깨가 심하게 출렁인다. 기력이 빠져나간 다리가 지난시간들을 힘겹게 받치고 있다. 손질이 쉬운 짧은 머리. 동공은 초점이 없고 틀니조차 할 수 없는 입가가 합죽하다. 순간 명치끝이 울컥한다. 그 제서야 주르륵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아들 내외에 의탁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곳으로 왔다. 처음부터 요양원신세를 진 것은 아니다. 어머니 사후 급격하게 허물어진 정신과 약해진 괄약근도 한몫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집안 곳곳에 흘리고 다녔다. 식탐도 줄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치매 노인의 특성이라는 가출은 더 큰 문제였다. 두어 번 사라진 아버지를 찾느라 혼비백산한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님, 이젠 도저히 안 되겠어,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 것 같아!” 걱정스럽게 운을 떼는 동생에 비해 나는 남의 이야기 하듯 대답했다. “그렇게 해, 집에서 모시지 못한다고 해서 너 나무랄 사람 아무도 없다.”

 카드키가 없으면 열지 못하는 문, 떡과 사탕은 질식할 염려가 있으니 드리지 말라는 벽보, 4인실 창가 쪽의 침상하나. 아버지의 말년은 당신이 품어 키운 자식들에 의해 위리안치 되었다.

 가끔 길섶이나 둑길, 혹은 이름 모를 무덤가에 한두 포기 피어있는 억새를 볼 때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리 속에 끼지 못한 고독함, 세상에 연착륙 하지 못한 아버지의 외로움이 생각나서다. 아버지는 조부모의 가슴에 자식 셋을 묻고 태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더하고 덜하고가 있으랴만 내 조부모만 했을까. 외가 동네가 생긴 이래로 처음 있은 맞선 상대는 어머니였다. 가장이 된 아버지는 재직하고 있던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조부모의 문전옥답이 아버지의 사업자금으로 날아갔고, 외가에서 몰고 나온 소 한 자웅은 다시는 그 외양간에 돌아오지 않았다. 

 초년에는 부모덕으로 중년에는 마누라 덕으로 말년에는 자식 덕으로 산다는 친척들의 말처럼 아버지는 무능했다. 빈번한 실패의 뒷감당조차 어머니 몫이었으니까, 실패에 당당하게 맞서는 대신 어머니를 방패로 뒤로 숨었고, 그것은 아버지의 타성으로 굳어졌다. 결국, 아버지의 세상은 단 한 번도 우화하지 못했다. 현실은 어떤 조건에서도 자생력 강한 억새여야 하는데 아버지의 삶은 지금도 온실 속의 화초다. 세상을 녹록하게 살아온 아버지에게 어쩌면 가장이라는 짐이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지친 듯, 아버지의 두 눈이 감겨있다. ‘훨훨’도 잠잠하다. 훨훨은 두 팔로 하는 날개 짓이다. 한 쌍의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자고 병상의 어머니와 약속했다는데, 어머니와 사별 후에 당신의 정신에는 날개가 생긴 모양이다. 아버지의 감은 눈 밑으로 엷은 눈물이 흐른다. 여기서도 고독과 외로움이 아버지 몫인 것 같아 손을 잡고 있는 나의 눈시울도 달아올랐다. 

 가을은 억새 숲을 뒤척이며 가고 있다. 간다는 말에는 이별과 단절이 녹아있다. 세상의 어떤 이별이 슬픔 앞에서 초연 할 수 있을까. 죽음으로 끝나는 이별은 더 슬프고 서럽기 마련이다. 그것이 예고된 이별이라 해서 슬픔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시한부였던 어머니와의 이별이 그러했듯이 가을이 떠나는 것도 예고된 일 아닌가. 매서운 냉기를 실은 바람이 휘모리로 가을을 밀어내고 있으니 아무래도 저 억새들은 가을의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리라. 그래서 일까. 억새들의 무수한 손사래에는 저물어가는 안타까움이 있다. 늦가을 어느 땐가 된 서리 서설처럼 내리는 날, 억새들은 스러질 것이다. 뉘라서 부러 들추어 따뜻한 햇살 한줌 쪼여줄까. 생이 저물어 가는 아버지를 보며 가슴 한구석으로 시린 바람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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