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부른 조홍시가
윤기정
1965년 가을, 서울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고향’이라는 어감이 푸근하여 좋았고, 누구에게나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서울내기이면서도 고향으로 삼았다. 방학 때마다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촌, 육촌 형제가 있었고 친구가 있었으며 추억이 있으니 고향 아닌가!
중학교 졸업 후 본교 진학에 실패하였다. 후기 고등학교 입시에도 낙방하였다. 운전 중 교통사고를 내고 실직 중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열여섯의 나이에 집안의 두 번째 실업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목이 휘도록 광주리에 과일을 이고 와서 버스 정류장 앞에 펼쳐놓고 팔아서 일곱 식구의 생계를 이었다. 우리 4형제와 외할머니까지 일곱 식구의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빈둥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 중 일부는 소규모 공장에 ‘꼬마’로 불리며 잔심부름을 하면서 기술을 익히기도 했지만, 대개는 일없이 껌을 질겅거리며 골목길을 몰려다니기 일쑤였다. 나 역시 험한 눈빛을 하고 침을 찍찍 뱉어대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거리를 누볐다. 어머니 눈에 띄지 않게 다녔지만, 끝까지 숨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산골짜기 고향으로 쫓겨 갔다. 잘못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기대하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향에 가서 농사나 배우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내 깐에는 반항을 한 것이었다. 고향에는 방학 때면 만났던 집안 형제들과 친구들이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거리의 자식에서 산야의 자식으로 빠르게 적응하면서 오히려 즐거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네에서 말썽만 부리지 않으면 나무라지 않았다.
고향엔 감나무가 많았다. 감이 익어가는 가을이면 마을이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김이 익어갈 무렵의 어느 날 늦은 오후였다. 감나무 가지 벌어진 틈에 걸터앉아서 저녁놀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은 서서히 드는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인가? 그날 감나무 가지에서 철이 들었나 보다. 바로 편지를 썼다. 깊이 반성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내년 입시엔 반드시 합격하겠노라는 다짐을 적었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두어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없는 살림에 학원 등록까지 지원받았다. 학원 모의고사에서 두 달 만에 최상위 그룹의 성적을 냈다. 이듬해 원하는 고등학교에 무난히 진학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던 거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깊은 산골 감나무 가지에서 철든 아이, 부모와 선생들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아이가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어머니는 백발이 되었고, 치매로 하루하루 당신과 세상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10월 중순 새벽에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수술로도 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동생들과 어려운 결정했다. 어머니의 수술을 포기했다. 멀리 알제리에 출장 가 있던 아들, 당신 손으로 키워낸 손자에게 이틀 동안 미루었던 할머니 소식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며칠은 길고 긴 시간이었다. 어떤 순간들은 흑백 스냅사진처럼 정지된 영상으로 지금인 양 떠오르기도 한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전날 밤이었다. 아내와 교대로 병상을 지키고 한 사람은 집에 오가며 쉬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날랐다. 집에 들렀을 때였다. 다용도실 과일 상자에 홍시 몇 개가 있었다. 홍시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사과도 숟가락으로 긁어서 드시던 부실한 치아에 홍시는 딱 좋은 간식이었다. 가을이면 아내는 집에 홍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폈다.
‘혼수상태에서 드실 수 있을까? 병원 허락을 받아야 하나?’ 홍시만 보면 어린애처럼 활짝 웃던 병상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지작거렸다. 의식도 없이 링거에 의지한 상태인데 아무래도 안 될 일이었다. 손에 쥐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만 내려놓았다. 다음날, 당신의 손자가 먼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밤에 큰 숨 몰아쉬고 나자 곧 병상 머리 탁자에 놓였던 모니터의 물결선이 가파르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물결 간격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윽고 수평선이 되었다. ‘할머니!’ 다급히 병실로 들어온 손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과일 가게마다 작은 홍시 피라미드가 세워졌던 2011년 가을이었다. 때를 아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양평에 지은 지 30년이 넘는 헌 집을 헐고 집을 지었다. 어머니 생전에 바라던 마당 있는 집이었다. 봄이면 무수히 등을 켜 드는 자목련, 밑동에 푸른 이끼 낀 감나무와 원뿔꼴의 미끈한 주목 10여 그루는 집과 함께 여러 해 풍상을 겪은 품이 역력했다. 공사 중에 자목련과 주목 몇 그루는 자리를 지켰지만 다른 나무들은 공사 진척에 따라 두 번을 옮겨 심어야 했다. 오래된 나무는 함부로 대하기가 어렵다. 그 앞에서는 자못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소중한 생명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루었건만 다 살려내지는 못했다.
집을 다 짓고 나서 나무들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심었다. 감나무는 특별히 좋은 자리를 가려서 심었다. 낯선 흙에 뿌리내리기가 힘겨웠는지 지난해에는 고작 서너 알의 감을 맺었다가 매실만 해졌을 때 다 빠져버렸다. 올해는 ‘내가 바로 대봉일세.’ 자랑이라도 하듯이 주렁주렁 감을 매달았다. 햇볕 좋은 밭머리에 뿌리를 제대로 내렸나 보다. 감들은 저녁놀과 때깔 겨루기라도 하는 양 나날이 발갛게 익어갔다.
잘 익은 홍시를 보면서 고향의 감나무와 만지작거리다가 놓고 만 홍시와 홍시만 보면 웃음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새들은 어찌 아는지 잘 익은 감부터 쪼았다. 새들이 다 쪼기 전에 익은 감은 따려고 사다리를 놓다가 그만두었다. ‘새들아. 많이 먹고 이 가을의 풍경을 대신 전하려무나.’ 발갛게 익어가는 감들을 바라보며 ‘조홍시가’(早紅?歌)를 읊조리다가 ‘품어 가 반길 이 없음’에 철든 그 날처럼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책과 인생》 201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