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우화
윤 기 정
‘매미’는 은어(隱語)로 ‘술집 접대부나 몸 파는 여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는 정의하고 있지요. 아가씨를 두고 영업하던 대폿집을 ‘매밋집’이라고 했으니 매미는 술집 접대부 즉 작부(酌婦)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술도 따르고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로 흥을 돋웠기에 매미라 불렀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되었지만요.
이 매미들은 여름 한 철 울어대는 집 없는 매미와는 달리 사철 울고 여럿이 모여 사는 집도 있었습니다. 이 매미들은 숲을 떠나고 도심을 떠나서 변두리 동네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매미들은 쇠젓가락으로 찌그러진 알루미늄 주전자나 화덕 상판을 두드리며 ‘헤~ 일 수 업씨 수마는~ 바믈~’ 열었습니다. 속곳 바람으로 드나드는 거친 말씨의 주인 여자도, 노래하는 아가씨들도 마을의 좀 평범하지 않은 이웃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눈인사 정도는 나누었으니까요. 동네 대폿집에는 다른 마을 남정네들이 드나들었고 아마도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옆 마을 매미를 찾았을 겁니다. 매미로 인해 다툼이 동네에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요.
매밋집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성년이 되기 전후였을 겁니다. 친구 중의 하나가 살림이 나은 집의 외아들이었지요. 친구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했지요. 두 집 살림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을 겁니다. 단짝이었던 친구들이 기꺼이 동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얼른 어른이 되고픈 마음은 같았으니까요. 친구들은 한동네에 가까이 살았고 나만 집이 멀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생활이 넓어지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먼 동네에 사는 나는 만나는 게 아무래도 뜸했습니다.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니 자연스레 술집을 드나드는 일도 줄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게 간단하지가 않더군요. 단맛 끝처럼 당기는 무언가가 가슴 한편에 숨어 있었나 봅니다.
학과 끝나고 군사 교육까지 마친 늦은 오후의 귀갓길이었습니다. 길가의 대폿집에서 여인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른 이피 한~닙 두~입 떨어지던~’ 때는 가을이었습니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에는 70년대만 해도 극장이 있었고 H 공고 맞은편 큰길까지 이어지는 골목에는 매밋집이 즐비하였지요. 어설픈 노랫소리가 궁금했습니다. 조금 열린 미닫이문 틈으로 한 여인이 처연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동그란 얼굴과 눈, 끝이 살짝 들린 코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직 술청에 손님이 들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무료한 기색이었습니다. 얼핏 눈길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냥 지날 수가 없었습니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디붉었거든요.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여인이 놀란 눈빛으로 일어섰습니다. 갈라진 지붕 틈으로 한 줄기 햇빛이 여인의 뺨에 쏟아졌습니다. 실핏줄이 내비칠 것 같은 투명한 뺨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푼돈이 모이면 그 집에 갔습니다. 그녀는 매상을 많이 올리지 못해도 개의치 않았지요. 남도 사투리로 날 보면 고향 오빠가 생각난다 했고요.
해가 바뀐 뒤에도 잊지 않을 만큼은 들렀습니다. 친구들과 그 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폿집을 약속 장소로 정하기도 하던 때였지요. 모여서 같이 오겠다던 친구들은 약속 시각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요. 그녀가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주었지요. 막걸리 한 잔 두 잔 마시면서요. 몇 잔 마시고 나더니 남의 이야기인 양 무심한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고향, 엄마, 학교 그리고 가난으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야기가 끊어질 때면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불안한 음정 사이에 촉촉함과 간절함이 뱄습니다. 이야기도 노래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침을 삼키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마른 입술을 달싹일 때면 등을 토닥여 주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닮았다는 오빠 이야기는 없었지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다니는 두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여동생들이었다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날 친구들과 만남은 신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새 장난기 어린 얼굴로 술자리 분위기를 돋우는 그녀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평소보다 술잔을 자주 비워야 했습니다.
그해 여름 3주간의 입영 교육을 끝내고 돌아온 서울은 매미들의 울음 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가까운 동네 어디론가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가을이 끝날 때까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찾을 수 없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고향의 오빠는 친오빠였을까? 아니면 그녀를 서러운 서울 하늘 아래로 내몬 첫사랑이었을까? 1974년 여름 나는 성큼 어른이 되었고, 그녀는 사라졌습니다. 도심 플라타너스 등걸에 부서진 꿈처럼 껍질 하나 붙여놓고 ‘푸루루’ 하늘 높이 날아올랐겠지요? 정든 고향으로 날아가 지친 날개를 접고 오빠를 찾았겠지요?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있습니다. 느린 부채질로 잠든 손자에게 달려드는 파리를 쫓기도 하고 평상 끝에 걸터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영감에게도 가끔 부채 바람 한 점 보내면서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모습이 그날처럼 그려져 가슴에 시린 바람이 입니다. 세상의 끝 같았을 시간일랑 부디 잊었기 바랍니다. 1974년 여름. 서울. 어느 누이의 우화(羽化)가 있었을 겁니다.
《시선》 201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