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었습니다
윤기정
잎도 변변치 않게 달린 가지에 서너 개씩 몽우리가 앉더니 8월에 접어들면서 주황색 꽃을 주르르 달았다. 능소화였다. 연전에 대문을 새로 세울 때였다. 문설주를 부수고 기초를 파헤치니 문설주에 기대어 가지를 뻗었던 능소화 뿌리가 깊게 박혀 있었다. 뿌리를 몽땅 들어내고 기초 공사부터 다시 하여 문설주를 새로 세웠다. 그 옆에 수도를 놓고 수돗가 바닥에는 디딤돌을 아귀 맞추어 촘촘히 깔았다. 큰 나무에 손대는 일은 마음 켕기는 일이다. 늘 쉽지 않았다. 나무가 겪은 세월의 풍상에서 나름 품격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능소화 뿌리를 캐냈다. 능소화가 아이들 눈을 멀게 한다는 소문을 귓등으로 흘리기 어려웠다. 곧 손자가 태어날 텐데 굳이 좋지 않다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 봄에 문설주와 디딤돌이 만나는 곳의 좁은 틈으로 가느다란 가지 하나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다 들어낸 줄 알았던 뿌리에서 돋은 능소화 한 줄기가 빛을 찾아 나온 것이었다. 디딤돌 틈으로 스민 몇 방울의 물로 목을 축이며 눈도 없는 것이, 야물지도 못한 것이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나온 모양이 가상하였다. 남은 뿌리가 있더라도 굴착기의 쇠 발톱에 찢기고 끊기면서 상처가 컸을 텐데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었나 보다.
능소화 줄기가 감고 오르도록 가지치기해 두었던 목련 가지를 세워 주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가지 끝까지 능소화 줄기가 감고 올랐다. 가을까지는 더 자랄 것이기에 긴 가지 하나를 덧대 주었더니 그 가지 끝까지 감아 올랐다. 겨울이 되자 잎 진 빈 가지로 삭풍을 견디더니 지난해 여름에 처음으로 한껏 꽃송이를 달았다. 능소화를 바라보면서 미안함과 경이로움이 교차하였다. 눈먼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달랐다. 석양에 벌겋게 물든 구름이 걸린 서산을 배경으로 능소화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노을과 구름과 꽃 빛이 하나였다. 노을은 고단한 생명에게 또 내일이 있다고 속삭이는 희망과 위로가 아닐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12월 겨울 추위가 시작될 무렵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돈 벌러 갔던 월남에서 영정 사진 앞세운 흰 상자에 담긴 채 낯모를 사람의 가슴에 안겨 돌아온 것이었다. 무허가 단칸방이 유산의 전부였다. 골목으로 난 하나뿐인 창은 너무 낮아서 아이들도 지나면서 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길바닥에 나앉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 방이 다섯 식구의 안식처였다. 그해 겨울 방학에는 점심과 저녁은 삶은 물고구마가 끼니였다. 배고픔에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해가 바뀌고 옆집에 새 가족이 이사 왔다. 갑자기 동사무소에서 무허가 건물을 자진 철거하라는 독촉장이 오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독촉장이 오더니 기어이 강제 철거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새 주인이 동사무소에 드나들면서 닦달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집을 헐고 새집을 지어야 하는데 자기네 담벼락에 붙은 부스럼 같은 집을 털지 않고는 어려웠으리라. 오래된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해준다는 소문에 기대를 걸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두 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교련이 정규 과목이 되면서 가출을 했다. 가출의 이유가 그것 뿐은 아니었으리라. 쓰러진 가세를 왜 몰랐겠는가. 그 아래 나와 다섯 살 터울의 동생은 중학생 때만 해도 기대되는 트롬본 주자였다. 진학을 앞두고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상의도 없이 몰래 본교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생으로 받아준다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어느 학교나 대개 밴드부는 규율이 셌는데 그 학교는 유난히 선배들에 의한 폭력이 잦았다. 피멍이 든 엉덩이를 보이면서 자퇴하겠다는 동생을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막냇동생 친구들에게 과외 지도를 하면서 끼니를 거르지는 않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할 고등학생이 과외지도하고 있으니 입시 준비에 몰두하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형편을 생각해서 현역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대학을 택했다. 초등학교 학생 과외는 대학 다닐 때까지 계속했다. 안성맞춤의 아르바이트. 아니 생업이었다. 아이들의 성적이 향상되면서 입소문을 타고 동네의 유명 강사가 된 덕에 학생은 늘 대기 상태였다. 단칸방이 교실이자 일터였다. 수업 중에는 식구들은 밖을 서성여야만 했다.
일터이자 가족의 보금자리인 단칸방이 헐리게 되었는데 장남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들의 가출도, 자퇴도 막지 못했던 무력감에 무력감 하나가 더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나도 모르게 옆집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언뜻 바라본 저녁노을은 핏빛이었다. 설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큼지막한 돌을 들어서 철 대문에 집어 던졌다. 여러 차례 던졌다. 굉음이 온 동네를 흔들었다.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과 실랑이를 했다. 이튿날 파출소에 출두해야 했다. 동네 어른 두 사람이 딱한 사정을 알고 스스로 동행해주었다. 동행한 어른들의 호소로 훈방이 되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가족을 위한 동네 사람들의 응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집주인이 찾아왔다. 나름대로 이주에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앞으로 살아갈 동네에서의 평판도 생각했을 게다. 어머니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경기도 성남에 전세를 끼고 급히 집 한 채를 사 두었다. 전세를 빼 줄 돈이 없어서 약수동 집을 헐어낸 자재로 마당에 방 한 칸을 세웠다. 집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달라진 것은 길보다 높은 마당 위의 집이라 누구도 방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가 약속을 지켰기에 최소 비용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 돈을 융통해서 그 집을 마련해 두었는지 용하기만 했다. 유년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의 추억이 골목마다 서린 곳, 동생들이 나고 자란 약수동을 그렇게 떠났다. 두 동생은 중단한 학업을 다시는 잇지 못했다.
어느덧 막냇동생이 환갑이 지났다. 동생들도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들 뒷바라지도 거의 마쳤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고만고만한 걱정과 잔병을 동무 삼아 늙어가고 있다. 손톱이 으스러지도록 한 줌 흙을 움켜쥐고 한 방울의 물로 혀를 적시며 빛을 향해 조금씩 밀고 나와 끝내 푸른 하늘을 이고 선 능소화가 낯설지 않다. 갈증을 참고 견디며 어느덧 예까지 와서 능소화와 마주 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었던 이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 온기는 잊지 않았다. 미미한 온기라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갚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살았다. 옆집에 대한 원망도 잊었다. 어쩌지 못하는 가난에 대해 속상함이었지 그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돌멩이에 맞은 철 대문의 비명이 높던 날의 노을이 핏빛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능소화 줄기가 어른 엄지만큼 굵어졌다. 디딤돌을 깨서 넉넉하게 틈을 내야겠다. 물관을 활짝 열어 뿌리의 노고가 꽃술까지 오르도록 말이다. 석양 뒤의 어둠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며 아픔만은 아니었던 지난날을 고마워하자. 능소화처럼 정갈한 모습으로 땅에 내려앉는 날까지.
《문예바다》 2019.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