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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역    
글쓴이 : 이기식    19-11-01 09:32    조회 : 4,059


 강경 역  

이기식  

  1.4 후퇴 때 서울에서 강경으로 보름을 걸어서 피난을 왔다. 채운산 자락에 집을 마련했다. 코 바로 앞이 강경 역이었다. 학교는 산의 뒤편이라 산을 넘어야만 갈 수 있었다. 등교하는 일이당시의 나로서는 작은 전쟁이었다. 멀어서가 아니었다.

  오른쪽으로가면 고아원을 지나가야만 했다. 고아원 문 앞을 지날 때마다 고아원의 형들이 이유도 없이 때렸다. 점심 도시락을 뺏긴 적도 있었다. 왼쪽으로가도 문제가 있었다. 산 중턱쯤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큰 바위 밑에 동굴 같은 틈새가 있었다. ‘뼉 바위’라고 불렀다. 일본형사가 우리나라 처녀를 끌고 와 몹쓸 짓을 한 뒤 죽인 곳이라 처녀 귀신이 나온다고 했다.

  어느쪽이든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방과후에는 되도록이면 역으로 잘 갔다.가깝기도 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진짜 좋은 것은 기차를 바라 보는 것이었다. 증기기관차가 서서히 역에 들어와 하얀 수증기를 양편으로 '치~이익' 내 뿜는다. 그모습이 동화책 속에 서 보던 하얀 카이젤 콧수염을 기른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닮았다. 그리고 말을 건다.

  "어서 타! 어디든데려다 줄게!"

  당시 강경역은 몹시 북적거렸다. 남으로 가는 피난민, 다시 서울쪽으로 향하는 승객뿐만 아니라 삶은 계란, 인절미 등을 파는 아주머니나 아이들도 많았다. 가끔 탱크, 대포나 지프를 실은 열차도 급히 지나갔다. 신병훈련소인 연무대에 입영하는 신병들도 강경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기다리는동안 솥을 걸어 놓고 밥도 짓고, 이발도 하는 것이 보였다. 신병들이떠난 뒤 빈 열차 칸을 이리저리 뒤지다 보면 사탕 과자봉지, 꼬깃꼬깃 뭉쳐 놓은 돈이나 때로는 몸에지니고 다니는 부적도 발견한다. 줍긴 줍지만 마음은 그리 편치는 않았다.

  스릴 있는 일도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철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역에서 막 출발한 기차에서 뭔가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얼른 쫓아가 떨어진 부대를 열어보니 석탄덩어리들이 달빛에 번쩍거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비싼땔감이었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부리나케 한곳에 모아놓고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험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 눈에서하얀 불이 번쩍 나게 맞았다. 그 사람이 또 때리려고 하는데 뒤에서,

  "아니, 너이 교수 아들 아냐!"

  하면서 다른 청년이 나타났다.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러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났다. 나를 때렸던 사람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석탄 묻은돈을 꺼내 쥐여주면서,

  "빨리 집에 가봐라.다음에는 못 본채 해, 알았지!"

  기관사와 짜고 석탄을 훔쳐 파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되었다. 다음 날 두 동생을 데리고 집에서 되도록먼 가게로 가 양갱과 사이다를 사먹었다. 아버지한테 들 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후로 두 번인가, 세 번 석탄 부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역 근처에 사는 꼬마들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미군들이 역 광장에 나타날 때가 가장 신났다. 백인과 흑인이 섞인미군들이 떠들어 대는 것이 신기했고 ‘C레이션’이나 초콜릿, 껌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미군 한 명이 전신주 중간쯤에 ‘C레이션’을 따서 올려놓았다. 누가 빨리 가져가는 가를 구경할 심산이었다. 나는 잽싸게 깡통을 낚아채었다. 그 순간 내 손을 들여다보고있는 미군의 커다래진 파란 눈이 먼저 보였다. 양철 깡통이라 따개로 돌돌 말아서 딴 자리는 날카롭다. 손바닥이 깊게 베여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미군은 상처에 붕대를칭칭 감아주고는 시레이션 서너 개를 안겨주었다. 동네아이들의 부러워하는 눈들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집으로왔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골라가며 먹었다. 한 개는 헛간에숨겨 놓았다.

  마지막6학년의 여름방학이었다.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드는 여름방학이었다. 숙제 때문에 시내 책방에서 참고서를 사러 나갔다가 집으로 오다가 철로 건널목을 건널 때였다. 통행인의 안전을 위한 경보기가 있었고, 그 밑에 ‘뽀인트(선로전환기)' 라고부르는 기계가 웅크리고 있다. 쇠로 된 원반 가운데에 손잡이가 나와있는 장치인데, 꼭 한번 만져 보고 싶었었다. 그날은 무슨 생각인지 망설임도 없이손잡이를 한껏 끌어 올렸다.'철그렁'하는 소리는 들렸다. 사단이 난 것은 저녁 해질 때쯤 되어서였다. 역원들과 동네 사람들이갑자기 들이닥쳤다.

  "아니, 그래, 교수라는 사람이 아들을 어떻게 가르친 겁니까?"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그렇지, 열차가 탈선할 뻔했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고, 경찰에 가자는 소리, 아들을 데려오라는 등의 성난 소리에 묻혀 아버지의사과하는 소리도 들렸다. 투덜거리며 다들 돌아간 뒤에 아버지는 내가 숨어 있는 헛간으로 오셨다. 말없이 옆에 있던 쇠막대기로 나를 후려치셨다. 구멍 난 지붕 사이로비추는 달빛에 붓고 피 멍이 든 정강이가 보였다. 감춰두었던 ‘C레이션’을 뒤져보니 커피와 소금 그리고 냅킨만 남아있었다. 동생들이 몰래먹은 모양이었다. 커피를 입에 넣으니 흘린 눈물과 섞여 이상한 맛이 났다.

  ‘뽀인트’사건이있었던 그 해 겨울 나는 카이젤 수염의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뽀인트’는 누군가의 궤도를 바꿔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얼마 전 이번 봄의 초등학교 동창회는 오랜만에 강경의 금강 둑 근처에 있는 소문난 황복집에서 하기로 정해놓았다. 그곳의 토박이 동창들도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소주한 병씩을 치울 즈음이 되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그려~, 잘 가~들~’하는 충청도 인사를 서로 아쉬운 듯이 나눴다. 역 앞의편의점에서 양갱 한 개를 사 들고 기차에올랐다. 언뜻, 창밖에 역 주위를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달 빛에 비쳐 보인다.

  열차가 서서히 출발한다. 갑자기 나는 이 역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2019/11/01]

   

[인간과문학 2017 겨울 제20호 ‘내 고향은 강경역’ 수정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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