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떨어질 때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중이었다 . 길에는 낙엽이 굴러다니고 우리보다 한발 앞서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 친구가 앞에 가는 사람 흉내를 내느라 내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 친구 손에 이끌려서 몇 발짝 걷는데 친구가 ‘정호승 시인의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라는 시 한 대목 읊었다 .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
친구가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나무를 올려다보며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 단풍나무가지에 낙엽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내가 친구 어깨를 툭 건드리며 응원을 했다 .
“친구 , 아따 실력이 녹슬지 않았네 ! 자네는 학교 댕길 때 시집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녔제 …. 나는 낙엽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내 삶도 단풍잎처럼 곱게 물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뿐일세 . 낙엽을 보며 가을을 노래하는 자네가 ‘추남 ’ 아닌가 !”
친구를 ‘가을 남자 ’라고 부추긴 뒤 혼잣말을 했다 .
“나무는 바람 잘 날 없었제 . 나무가 봄에 새싹을 내민 뒤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어서 옷을 벗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참 많단게 . 사람들은 나뭇잎에 단풍이 들면 곱다고 찬사를 보내는디 , 나무가 천둥 ·번개 , 눈 , 비 , 바람에 맞서 싸우다가 가지가 부러져도 쓰러지지 않고 참고 이겨낸 훈장이란게 .”
“나무가 전쟁이라도 치렀단 말이오 ?”
친구가 엉뚱한 말을 하고 , 나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
“웬만한 나무는 사람의 수명보다 몇 배나 길단게 . 고향에 수호신처럼 떡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도 500 년이 넘고 , 용문산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 호로 천년이 넘었다며 ? 나무가 오래 사는 까닭은 해마다 나무에 새싹이 돋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
고향에 느티나무는 전설처럼 떠돌고 , 인터넷상에서 접한 은행나무 장생을 기원하는 '제 26 회 용문산 은행나무 영목제 '를 들먹거리자 , 친구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게 던졌다 .
“자넨 용문산 은행나무 밑에서 도를 닦았는가 ?”
친구랑 주거니 받거니 ‘개똥철학 ’을 논하며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 환경미화원이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 때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 훼방을 놓는다 .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 낙엽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길 가던 사람들이 아저씨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 !”라고 , 큰소리를 쳤다 .
아저씨는 “괜찮아유 .”화답한 뒤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부렸다 . 바람이 멎자 아저씨가 은행잎 , 단풍나무 잎을 쓸어 모아 가마니에 담았다 . 배를 볼록하게 내민 가마니가 길가에 여러 개 놓여있었다 .
낙엽들은 가마니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며 푸른 꿈을 꿀 것이다 . 나무가 불에 타면 숯이 되어 세상을 환하게 밝힐 날을 기다리듯 , 낙엽들은 퇴비 만드는 공장으로 실려가 닭똥이나 돼지 똥과 한 몸이 되어 세상을 푸르게 수놓을 날을 기다린다 .
나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텃밭에 쓸 거름 몇 포를 집안에 들여놓았다 . 거름을 한 해 묵혀서 사용하다 보면 지렁이가 꿈틀거렸다 . 봄을 떠올리면 생기 있게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고 , 겨울에 헐벗은 나무를 바라보면 낙엽 진 자리가 상처로 다가왔다 . 상처가 아물어 새싹이 돋아나기까지 기다림이 지루해서 나는 겨울을 건너뛰고 봄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
친구는 낙엽을 바라보고 감상에 젖어있는데 , 나는 늦가을에 서서 다가올 봄을 여행하는 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친구 기분을 살리기 위해서 담장에 쌓인 낙엽 한 움큼을 쥐어서 친구 머리 위로 날렸다 . 낙엽 하나가 친구 흰 머리카락에 매달렸다 . 나뭇잎이 언제 떨어질 것인가 ? 내 눈길은 낙엽에 쏠렸는데 친구는 몇 번이고 시를 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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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 한 잎 낙엽으로 썩어 /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
정호승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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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질 때 친구의 시 낭송은 늦가을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 특히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라는 시어와 맞물려 나무의 사계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 겨울에 헐벗은 나무를 바라보면 마음이 시린데 , 여름날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내 마음도 풍선처럼 커진다 . 낙엽이 세상 뒤편으로 사라지자 내 마음 깊은 곳엔 어느새 봄이 찾아오고 !
성동문학 제 19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