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물다
진연후
“열아홉 살이 되면 제일 먼저 뭘 할 거야? 난 성인 기념으로 로또를 살 거야. 너희들은?”
중학교 3학년 용재는 성인이 되면 가장 먼저 로또를 사고 싶단다. 열아홉으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로또를 사 본 적이 없는 나는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30여 년 전에는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주택복권 당첨자를 뽑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재미있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프로였다. 그런 건 어른들이나 보는 것인 줄 알았다. 더구나 그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서울에서 전세살이로 이사를 예닐곱 번 하는 동안에도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까... .
시골 집 방 하나를 수리했다. 20여 년 전 집수리를 할 때 남겨두었던 그 방은 열여덟 살까지 내 공부방이었다. 그 곳에서 ‘수학 정석의 기초’와 ‘성문 종합 영어’를 보았다. 천상병 시인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윤동주 시를 읽으며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고 끄적거리기도 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중학생이던 옆집 오빠가 공부를 도와준다며 드나들었던 쪽문, 오빠가 직접 만들어 준 학습지를 풀던 책상이 놓였던 서쪽 창가, 그 창가에서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어린왕자를 떠올리기도 하고, 캔디의 아저씨 안쏘니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중?고교시절 놀러온 친구와 벽에 기대어 밤새도록 그려보았던 미래는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수리하면서 남쪽으로 난 쪽문을 없애고 작은 창을 달았다. 창호지문으로 비치던 햇살도, 문종이를 가볍게 흔들던 바람도 사라졌다. 새로 바른 벽지 냄새는 예전 묵은 책 냄새를 지웠고,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계획들을 지웠다. 이제 그 곳은 2주에 한 번씩 가방을 던져두고 잠을 자는 곳이다. 꿈을 꾸던 방에서 꿈(夢)만 꾸는 방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마흔이 넘어서 얼떨결에 내 집 장만이라는 걸 했다. 처음으로 시도한 아파트 청약에서 분양을 받았을 때, 주위에서는 로또에 당첨된 것이라고 했다. 동생이 입주 선물로 거실 한쪽 벽면을 책장으로 채워주었을 때서야 실감이 났다. 작은 책상 위 책꽂이에 전과, 수련장 그리고 삼중당 문고 몇 권이 전부였던 시절, 언니 오빠가 있어 책이 많은 친구네와 세계명작 전집이 번호순서대로 꽂혀있던 큰 집엘 수시로 드나들던 그 때 나의 부자 기준은 책장의 크기였다. 집세 인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고, 무엇보다 더 이상 갖고 싶은 책장이 없으니 부러워할 부자가 없다. 다만 책장 가득 꽂혀있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해가 지는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안타깝고 매일 잠만 자는 공간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가끔 생각하면 쓸쓸해질 뿐이다.
세계 3대 부자 중 한 명인 워렌 버핏의 재산은 99조원이란다. 로또에 몇 번을 당첨된 것보다 큰 돈이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시가 7억원 정도로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전세도 얻기 어렵다. 그에게 왜 럭셔리한 저택으로 이사 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왜 이사를 가야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지금 사는 집에서도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이사를 갈 필요가 있느냐고.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할 거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큰 집, 비싼 아파트를 살 거란다. 그런 다음에야 행복이 시작되는 것처럼. 큰 집에 사는 것이 부자라고, 부자가 되면 행복하다고 믿는 아이들. 그들도 곧 어른이 되겠지. 그리고 꿈만으로도 행복한 이 시간을 그리워할지도... .
계간 시선 201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