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눈, 유레카
윤기정
벌거벗은 알키메데스의 외침 ‘유레카’는 앎의 환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유레카는 그리스어로 ‘알아냈다’라는 뜻이다. 며칠 전 ≪우리 말 풀이사전≫을 뒤적이다가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살품’이라는 낱말을 찾았을 때, 아니 보았을 때라고 해야 하나. ‘옷과 가슴 사이의 빈틈’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 남자는 후루룩 후루룩 국밥을 먹으며 주막집 아낙의 살품에 흘낏흘낏 눈길을 보냈다’라는 예문이 실려 있었다. 남정네에게 쓰지 않는 말로 어느 정도 성적인 느낌이 있는 말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놓았다. 소리도, 그려지는 모양새도 상큼하고 예뻤다. 유레카!
며칠 뒤 또 한 번의 ‘유레카’에 끊었던 담배 생각까지 날 지경이었다. 격정을 다스리는 데 담배만 한 것이 어디 있으랴. 흡연 욕구를 겨우 누르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금세 쌓이는 눈을 보며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눈 내린 새벽으로 날아갔다. 부엌과 안방 사이 벽에 간단한 음식을 들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당으로 마루를 거쳐서 안방으로 밥상 들이는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주려 아버지가 뚫은 구멍이었다. ‘얘들아. 눈 왔네.’라는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밥 익는 냄새와 더운 김이 구멍으로 밀려들었다. 내복 바람에 방문 앞으로 무릎걸음을 했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볼 수 있도록 창호지를 잘라낸 격자무늬 한 칸에 어른 손바닥만 한 유리가 붙어있었다. 유리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니 콧김으로 부예졌다.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고 내다보았다. 우물이 있는 조그만 마당이 온통 뽀얀 밀가루 같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동생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양말도 신지 않은 채 고무신을 신고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섰다. 낯설었다. 꼬맹이들 떠드는 소리로 가득하던 골목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 아래 눈 쌓인 길은 환히 빛났다. 눈이 세상 소리를 다 빨아들였는지 좁아진 골목에는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이마를 맞댄 낮은 지붕들이 눈을 이고 더 낮아 보였다. 물에서 나온 새가 깃털을 털 듯 몸이 푸르르 떨렸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발자국 하나를 찍었다. 이내 한 발로 뒤꿈치 자국을 중심으로 발부리를 돌려가며 꾹꾹 밟았다. 국화꽃 한 송이가 눈 위에 피어났다. 뒤처진 눈송이 한 알이 하얀 국화 위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의 깨끗함과 순백의 환함과 숨 막히는 고요를. 학창 시절 작문 시간에 그 새벽의 골목 정경을 글로 써 보려고 몇 번 애쓰다가 말도 글도 가난함만을 깨달아야 했다. 글솜씨 좋은 작가라면 모를까 내겐 어림없는 일이었다. 상(像)으로만 남아서 눈 내리는 날이면 가끔 눈앞인 듯 떠올랐다. 오늘처럼.
눈은 오전 내내 내렸다. 우리말 사전에서 표제어 ‘눈’을 찾아보았다. 싸라기눈이나 함박눈은 들어 봤어도 ‘가랑눈, 길눈, 눈설레, 도둑눈, 떡눈, 살눈, 설밥, 소낙눈, 자국눈, 잣눈, 풋눈’ 이라니. ‘들어는 봤나?’라며 놀리는 듯하였다. 그리고 숫눈! 숫처녀, 숫총각의 그 ‘숫’이다. ‘눈이 와서 덮인 후에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상태의 눈’이 ‘숫눈’이고 ‘숫눈’ 쌓인 길이 ‘숫눈길’이다. ‘밤새 도둑눈이 내려 새벽에 골목은 숫눈길이 되었다’ 하면 될 것을 예순여덟 번째의 겨울에서야 알았다. 유레카!
내친 김에 숫눈이 보고 싶었다. 날마다 나서는 산책길. 남한강변 ‘하늘사랑길’은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데 눈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올 사람은 없을 듯했다. 가보니 자동차는 다닐 수 없는 길인데 눈 위에 타이어 자국이 어지러웠다.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굽은 길 저쪽에서 트랙터가 나타났다. 두 대였다. 꽁무니에 썰매 달린 밧줄을 매었다. 썰매에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하나씩 타고 있었다. 벌써 몇 바퀴를 돌았는지 눈길이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핸들을 잡은 젊은 사내들의 얼굴에 아비로서의 자랑스러움이 넘쳐났다. 아이들의 환호가 간간이 엔진 소리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 환호로 아쉬움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며칠 후 섣달그믐 전날 밤에 눈발이 또 날렸다. 이튿날 아침 숫눈 같은 건 싹 잊고 산책하러 ‘하늘사랑길’로 갔다. 울퉁불퉁한 바퀴 자국 위에 내린 눈으로 길은 평평치 않았다. 애써 발끝을 외면하고 시선을 강으로 돌렸다. 거기 너른 눈밭이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강추위에 강물이 얼더니 그 위에 눈이 쌓인 채 그대로였다. 숫눈이 거기 있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허허로웠다. 살면서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곁에 두고 멀리 돌아 찾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대문을 열고 마당 한가운데 섰다. 잔디밭에 쌓인 눈. 장독대 항아리 뚜껑마다 소복이 내려앉은 눈. 숫눈이다. 유레카! 애면글면 찾던 숫눈은 곳곳에 있었다.
겨우내 동으로 내달렸던 바람 돌아올 제 눈 녹고 얼음 풀려 강물로 부활하여 흘러도, 숫눈. 너의 이름을 불러서 떠올릴 수 있겠다. 그 겨울의 골목에 머물렀던 시간을.
《한국산문》 201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