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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삼총사    
글쓴이 : 박병률    20-03-02 23:08    조회 : 4,930

                                     할머니 삼총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서울시와 여성 신문사 공동주최로 여성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남자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마라톤 선수가 먼저 출발하고 걷기대회가 이어졌는데, 나는 참가번호 276번을 받았다. 많은 여성 가운데 일성여자중고등학교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눈에 띄었다. 학교 이름이 새겨진 노란 티셔츠를 입은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14살이유!”

  할머니가 14살이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인생은 60부터 유, 60은 덜어냈으니께 14살 맞지 유.”

  할머니의 말투와 눈빛, 강아지 얼굴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가볍게 걷는 모습이 영락없는 14세 소녀 같았다.

  “할머니,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어요?” 재차 물었다.

  “충청도 서산에 사는디유, 핵교 오는디 3시간 걸려유. 그러니께 왕복 6시간 걸려유,”

  할머니가 삼총사라며 두 분을 소개했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이란다.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라고 말하자 한 분이 학교자랑을 했다.

  “독립운동가 이준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일성이라는 호를 따서 일성여자중고등학교라는 이름을 지었대유, 교장 선생님이 그런디유,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금방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했시유.

  말이 끝나기 무섭게 65세 되었다는 분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할머니, 할머니 허니께 듣기 거북혀유, 앞으로 여학생이라고 불러유.”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 여학생님!”

 이라고 화답하자, 또 다른 분이 손뼉을 쳤다.

  할머니들은 어두운 땅속에서 겨울을 묵묵히 견디고 봄에 솟아나는 새싹처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말끝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자신감이 묻어나는 여중생의 모습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학생이라고 불렀다.

  어느새 깃발을 든 여학생이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갈 때 물고기가 강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할머니는 내 정체가 궁금했던지

기자 양반이유? 선생유?”

라고 물었다.

  아내가 일성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행사에 초대받았다고 하자, 세 분이 합창하듯 우리 선배님이네유.” 하시며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할머니들은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는데, 서산 할머니는 양원 초등학교 4년을 마치고 올해 일성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단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와 나, 삼총사 할머니들과 인사를 나눈 뒤 월드컵경기장 주변 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고 난 뒤였다. 주최 측에서 빵과 음료수를 나눠주었다. 저마다 한 봉지씩 들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잔디밭에 빙 둘러앉았다. 아내와 나는 할머니 삼총사와 자리를 함께했다. 서산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학교 자랑이 또 늘어졌다.

  ‘일성여자중고등학교는 1952년 야학으로 시작하여 약 5만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교정에는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무식(無識)이요. 또 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불학(不學)이니라는 이준 열사의 유훈이 붙어있단다.’

  나도 학창시절 이준 열사의 삶에 대해서 배웠고한국 혼 부활론을 읽은 적이 있다. 이준 열사는 고종의 밀사로 을사늑약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복자살했단다.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다녀온 뒤 이준 열사의한국 혼 부활론?을 떠올렸다.

 ?원컨대, 부패한 습관을 청산하고 우리 한국의 혼을 살리자. 그래서 굽히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정신으로써 이천만 동포가 한 입(), 한마음으로 한국 혼을 불러일으키고 불러내자.

  우리가 이 혼이 없으면 사람이어도 사람 아닌 사람이요, 이 혼이 없으면 나라이어도 나라가 아닌 나라가 되는 것이다.’

                                    - 이준 열사 한국 혼 부활론논문 중-

? 이준 열사의 한국 혼 부활론을 두어 번 읊조리자, 일성여자중학교 할머니 삼총사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금방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대유.” 하던, 여학생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으므로.

                                             한국산문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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