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첫사랑
이성화
“남편이 나한텐 첫사랑이고, 남편한테도 내가 거의 첫사랑이래.”
“첫사랑이면 첫사랑이지, 거의 첫사랑은 뭐야?”
수필가 박 모 씨의 말에 딴죽을 걸며 수필 제목으로 딱 좋네, 재미있네, 깔깔거리는 내게 박 모 씨가 제목 줄 테니 얼른 써 보라고 권했다.
“어? 나한테 주는 거야? 진짜 쓴다!”
못 쓸 것도 없지 싶은 마음으로 박 모 씨와 헤어지고 혼자 마로니에 공원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거의 첫사랑’이라고 자판을 두드렸다. 남의 남편을 불러내서 도대체 ‘거의 첫사랑’은 어떤 사랑이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고, 제목만 좋으면 뭐 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다양한 커플들이 들어왔다.
저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떤 사랑일까? 일곱 살 막내가 설사색이라고 표현하는 옅은 황토색 야상 점퍼를 입은 커플이 눈에 띄었다. 흰 티셔츠와 검정 바지에 운동화까지 그야말로 커플룩을 풀장착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커플커플’을 외치며 거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박 모 씨 부부가 연애했던 대학로를 휘젓는 저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길래, 저리도 자랑스레 사랑을 표현할까. 메모장을 긁적거리는 사이 설사색 커플이 사라졌다.
대신 까만 티에 설사색 멜빵 바지와 멜빵 치마로 ‘커플커플’을 뽐내는 두 사람이 그 자리를 메웠다. 올해는 설사색이 유행인가? 쓸데없는 생각만 들어차는 머리를 흔들고 보니 무릎에 여자 머리를 누이고 휴대폰 불빛으로 여자 귓속을 들여다보는 남자,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느라 반대편 손에 들고 있는 길거리 간식은 서로 먹여 주어야 하는 남녀, 친구나 동료 결혼식이라도 다녀왔는지 와이셔츠 차림으로 무릎을 베고 누운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화사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까지 온통 커플 천지였다. 혼자 멍하니 앉은 건 나뿐이었다. 커플들은 대체로 20~30대로 보였고, 그 외는 모두 아이를 한둘 끼고 있는 젊은 부부들이었다. 막내라도 달고 나왔어야 했나? 화창한 토요일 오후, 연인들만 들어찬 공원에서 어울리지 않는 장면을 찾으라면 나만 콕 집어 드러내면 될 듯했지만 오랜만에 여유롭게 햇빛 아래 광합성하듯 앉아 몇 줄 긁적이는 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첫사랑이었나? 중학교 때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던 그 오빠? 그건 짝사랑. 고등학교 때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 그건 풋사랑. 첫 직장에서 만나 결혼까지 고민했던 연하남? 그건 끝이 안 좋았으니 사랑이 아니었던 걸로. 모두 혼자이긴 외로웠던 내가 만들어 낸 가짜 사랑이었던 걸까, 그들 중 누구도 첫사랑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경험은 설레고 떨리고 안타깝기 마련이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불타오르던 첫사랑은 뜨거운 인두로 지진 듯 뚜렷한 자국을 남긴다. 심장에 남은 자국은 오래도록 남아, 문득 첫사랑이 생각날 때마다 온(on) 버튼을 누른 듯 뜨끔뜨끔 뜨거워지는 것으로 제 존재를 알릴 테다. 내가 아는 첫사랑은 그런 낙인이다. 그런데 설레던 짝사랑도 떨리던 풋사랑도 안타깝던 이별도 내 심장에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니, 내 심장은 돌덩이기라도 한 건지. 친구들의 예상을 뒤엎고 아이를 셋이나 낳으며 14년째 같이 사는 남자가 역시 예상을 뒤엎고 첫사랑일까? 한 14년쯤 더 지나봐야 알 수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글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아이 셋을 집에 남겨 두고 남편과 함께 영화를 보러 나갔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자기한테는 내가 첫사랑이지?” 하고 던져 봤다. 이 남자, 아니라고 펄쩍 뛰며 초등학교 때를 운운했다. 초등학교 때 키스를 할 수가 있어, 손만 잡고 자겠다며 밤새 두근거리다 선을 넘을 수가 있어. 그게 무슨 첫사랑이람. 투덜거리는 내게 어딘지 억울한 듯 “그렇게 치면 자기가 첫사랑이지.” 하는 남편.
아! 이게 그 ‘거의 첫사랑’? 그런데, 박 모 씨 남편보다 한 단계 낮은 레벨 아냐?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서 블라디미르는 ‘그녀’를 보고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건드려 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라고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첫사랑이라 치다니?
맹물 같은 일상에서 모처럼 톡 쏘는 탄산 같은 첫사랑을 만나 허우적대던 나는 금세 김빠져 미지근한 설탕물이 된 사이다에 코 박은 기분이 되어 며칠째 컴퓨터 자판에 매달려 사랑 타령 중이다. 이러고 있으면 내 몸 어딘가에 깊게 박힌 인두 자국을 발견하기라도 할 것처럼. 발견하지 못하면 또 어떠랴, 100세 시대라고 하니 남은 50년 계속 지지다 보면 심장에든 콩팥에든 미지근한 손바닥 자국이라도 남을지 알 게 뭐람.
동인 수수밭길 제3호 수필집 <맑은 날, 슈룹>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