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3제
윤 기 정
강변에는 햇빛도 햇볕도 풍성하고, 바람도 넉넉하다. 강기슭에 부딪혀 찰싹이는 물결 소리가 있고,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힘찬 날갯짓 소리도 있다. 강 건너 툭 터진 하늘 아래로는 겹겹이 주름진 산야에 뭉게구름 그림자가 드리웠다. 날마다 누리는 자연의 선물이다. 선물에 대한 추억이 모두 산뜻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고마운 선물의 추억도 있다. 주었건 받았건 또는 주고받았건.
꼬마 숙녀의 선물
1학년 학예발표회 날이었다. 차례가 되어 무대에 줄지어 오르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예전 교단 정도 높이의 낮은 무대지만, 아이들 마음엔 가슴 떨리는 높은 무대였을 것이다. 줄지어 앉은 다른 반 학생들의 올려다보는 시선과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선 학부모들의 고요한 술렁임과 덩달아 고조된 선생님들의 설렘으로 실내 공기가 뒤챈다. 부푼 공기의 은은한 열기가 낮은 천장에 매달려 뜨거워지다가 더 오를 곳이 없어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면 강당은 뿌연 안개가 서리면서 한껏 달아오른다.
몇 개 반의 공연이 끝나고, 다음 반이 무대에 올랐다. 정렬을 마치고 담임선생님이 지휘봉을 잡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한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면서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어요.”라며 울상을 지었다. 강당 안은 순간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선생님은 “다녀오너라.”고 했고 합창이 시작되었다. 꼬마 숙녀의 종종걸음을 합창 소리가 따라갔다. 아이가 돌아왔을 때는 다음 반 학생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여러 날을 연습하고 어제는 마치 소풍 전날처럼 무대에 설 생각에 잠을 설쳤을 꼬마 숙녀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마지막 반의 공연이 끝나고 교장의 총평시간이 되었다. 총평이라지만 학생과 선생님들의 노고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시간이었다. 좌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모두가 집중했을 때 입을 열었다. “오늘 꼬마 숙녀 한 분이 추억 거리를 놓쳤습니다. 물론 화장실에서 들은 친구들의 합창도 좋은 추억이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노래한 추억이 더 갖고 싶지 않을까요?”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 반의 합창을 다시 한번 들어 봅시다.” 어느 반의 특혜라고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은 가슴에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한 선물 하나씩 안고 가지 않았을까?
촌지의 추억
요즘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우는 학생을 보기 드물다. 모두가 중학교에 진학하니 학업 중단이 서러운 아이도 없고, 동네별로 같은 중학교로 배정되니 헤어짐의 아쉬움도 적다. 졸업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다. 선생님들은 식이 끝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기념사진의 모델이 되어 준다. 한바탕 촬영이 끝나면 가족들끼리 중국음식점으로 혹은 고깃집으로 흩어져 간다. 교실에 혼자 남은 6학년 담임의 마음은 이때, 말 그대로 시원하고 섭섭하다. 창 너머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승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응, 승이야 왜 안 가고…?” 문 앞에서 고무신을 벗어든 할머니가 뒤따라 들어섰다. 승이는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승이 사정을 알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표시 안 나게 도와주었다. 승이는 학습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성격이 밝아서 교우 관계는 좋았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승이가 선생님 많이 좋아했어요.” 하면서 한쪽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엇인지 눈치를 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내민 손을 한 번 감싸 쥐며 인사했다. 할머니 손의 온기가 묻은 구겨진 지폐 한 장이었다. 담배 한 상자를 살 돈이었다. 그 돈을 촌지(寸志)라고 거절했다면 지금까지도 가슴 아팠을 것 같다. 어쩌면 할머니나 승이도 그랬을 것만 같다.
환갑 선물
교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학교는 6학급에 전교생이 300명에 불과한 서울에서 가장 작은 학교였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들어앉은 학교는 남향의 2층 교사와 낡은 강당 하나가 전부였다. 조그만 운동장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네 코흘리개 꼬마들의 놀이터였고 마을 노인들의 쉼터였다. 체육 시간이면 어디서 누런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아이들과 같이 뜀박질을 하는 그런 학교였다. 부임한 이듬해에 6학년 담임을 했다. 한 반뿐이니 당연히 6학년 1반이었다. 페스탈로치의 생일과 내 생일이 같은 날이다. 그 작은 인연에 기대어 소명 의식을 다지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알려서 외적 동인으로 삼기도 했다. 마치 금연한다고 소문내서 금연 의지를 다잡듯.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산과 들에서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낸 나날이었다. 서울 변두리 작은 학교에서의 인연이 평생의 연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이 졸업한 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했다. 머지않아 마을은 개발되어 옛 모습은 사라졌다. 제자들도 흩어졌다. 몇몇은 마을에 남고 더러는 떠났다. 그래도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어린 시절의 우정을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 그 제자들의 청(請)으로 첫 주례를 섰다. '세 명의 제자가 그 중 한 친구의 주례를 부탁하려고 몇 차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사십 중반의 나이에 결혼식 주례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삼고초려를 생각나게 하는 간청을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허락하자마자 또 한 제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 저는 한 달 뒤입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별수 없이 두 번째 주례까지 한 자리에서 맡고 말았다. 나머지 한 제자가 기혼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세 건의 주례를 한 자리에서 맡을 뻔했다. 그렇게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동기회장인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올해가 환갑이시죠?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사모님 모시고 나오세요.” 그렇게 환갑을 맞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환갑을 저희가 책임지겠노라는 말을 하곤 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았던 일이기에 행복한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대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날이 아니라 그들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국산문》 20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