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지는것들
1970년 중반에 지어진 집들은 거의 겨울에 외풍이 심하고 여름엔 덥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유가 되면 리모델링을 하거나 집을 허물어버리고 새로 짓기도 한다. 내가 사는 서울 성동구에도 그 무렵에 지은 집들이 여러 채 있다.
2월의 끝자락, 겨울이 차츰 허물어질 때. 퇴근길이었다. 우리 집 주변에 오래된 집을 허물고 새로지으려는 듯, 집주인들은 이사를 가고 집집이 마당에는 헌 가구며 세간살이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 집 마당 앞을 지나는데 화분 하나가 먼지를 듬뿍 뒤집어쓰고 있었다.
“화분을 쓸까?”
하고 가까이 가봤더니 고무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나무는 밤새 추위에 떨었는지 이파리에 주황빛 멍 자국이 선명했다. 처음에는 고무나무를 뽑아버리고 화분만 가져가려던 참이었다. 오랫동안 나무를 바라보는데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화분에 심어진 나무까지 통째로 들고 전봇대 두 개를 지나서 우리 집에 도착했다.
목욕탕에 화분을 모셔놓고, 한 손으로 고무나무 이파리를 이리 제치고 저리 제쳐가며 수세미로 먼지를 닦았다. 그후 아기 다루듯 샤워기로 목욕을 시켰다. 이파리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전 주인의 손길을 물어보려다 그만 두었다. 보나 마나 묵묵부답일 테고, 새 집에 들어갈 꿈에 한창 부풀어있을 집주인에게 누가 될까 싶어서였다.
고무나무 샤워를 마친 다음 화분을 마루로 들고 나왔다. 나무 성한 부분을 남겨두고 가지치기를 했다. 자르자마자 세상 밖으로 토해내는 하얀 분노,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청테이프로 나무 끝을 빙 돌려가며 감았다. 한숨 돌리고 나면 펄펄 끓던 주전자의 물도 잦아들 듯, 상처에 반창고처럼 붙이고 하룻밤을 건너니 딱지가 앉았다. 다음 날 아침 봄 햇살이 나뭇가지를 어루만질 때 테이프를 떼주었다. 머지않아 고무나무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날거라는 기대가 컸다.
어떤 계기가 되면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 듯, 밭에 씨 뿌리는 생각을 하거나 화단에 어떤 꽃을 사다가 심을까 궁리를 했다. 괜히 서랍에 넣어둔 상추, 아욱씨 봉지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굴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생각하다 보면 자칫 내 마음도 느슨해져서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곰이 동굴에서 봄이 온 줄 모르고 겨울잠에 취해 있다면 곰은 굶어 죽을 것이고, 식물의 뿌리가 땅속에 오래 머물면 썩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터널을 빠져나가야 빛을 볼 수 있다. 빛은 어둠의 뿌리요.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씨앗에 둘러싸인 단단한 껍데기를 허물어야 한다.
화분을 집에 들여놓은 지 달포쯤 지났을까. 고무나무에 새싹이 9개 돋았다. 깨알만 한 눈은 점점 커져서 줄기가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잎이 넙적넙적 늘어났다. 고무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허물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무수히 생각했다. 겨울 · 고무나무 · 얼음 · 헌 집 · 달걀 · 씨앗 등, 무엇이든 새로운 집을 지으려면 단단한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동네 허물어진 집 앞을 지날 때 내 눈에는 마당에 버려진 화분만 크게 보였고, 고무나무는 하찮게 생각했다. 화분에 금이 갔는지 이리저리 살피다가 ‘혹시 나무가 살아있지 않을까?’라는 믿음이 생겼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슬픈 일일 텐데, 내가 집으로 고무나무를 들고 온 까닭에, 나무가 움이 트고 잎이 우거지는 것을 보았다. 화분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했다. 하마터면 추위에 얼어 죽었을 고무나무! 나무에 물을 줄 때 내가 가끔 말을 건다. “잘 커라 응.”
성광일보 2020,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