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초리
오길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던가. 해마다 5월이면 회초리처럼 여겨지는 꽃이 있다. 미농지처럼 부드러운 꽃잎도 물푸레나무 몽둥이처럼 단단해 보이곤 한다. 한 시절 가슴에 붉게도 꽂혔던 카네이션이다.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이 따갑게 들리는 때문이기도 하다.
1965년 5월 세종대왕 탄신일 즈음이었다. 여고 2학년 임원들은 ‘은사의 날’이란 분홍 깃을 가슴에 달았다. 그리고는 3학년 선배들이 정성껏 만든 음식을 가사실에서 교무실로 날랐다. 친구들 발걸음도 가벼워보였다. 평소 존경하는 스승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걸 생각하니 얼굴도 붉게 상기되나 보았다. 충청남도 강경여고이다.
이후 ‘은사의 날’은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1969년 3월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교직의 긍지가 남달랐다. 선배들이 이뤄놓은 카네이션 밭에서 근무하는 양, 은사의 날이 새로웠다. ‘스승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1982년 5월에는 교사가 된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동료들은 그 긍지 때문에 힘겨운 것도 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부터 추락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날이 이상한 나라의 날처럼 부끄러워졌다. 초롱초롱한 아이들 눈망울을 회초리 삼았던 교사들은 하루아침에 울렁증이 생겼다. 이제 스승의 날 즈음이면 교문을 잠그기도 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카네이션이 보일까 고민하는 슬픈 모습 이기도 하다.
교직은 늘 숨이 가빴다. 그 틈새를 비집고 일기지도를 하면 아이들은 글짓기 실력이 향상되었다. 노래를 부를 때면 그 귀여운 얼굴에 웃음이 가득히 번졌다. 과학탐구대회며 수학경시대회에 정성을 다하고 나면 꼭 결실을 안고 돌아왔다. 부족하지만 아이들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인가 싶어 고민이 머리를 맴돌았다. 1학년 한 학급 105명을 가르칠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여름 밤 논두렁길을 걸으며 지도한 끝에 전국웅변대회 최고상을 수상한 아이와 함께 얼싸안았다. 희망을 회초리 삼아 채근한 스스로의 열정에 돌아온 보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제 오월이 오면 근심도 함께 온다. 어떤 꽃이 또 학교를 때릴까, 은근히 떨리곤 했다. 학교를 떠난 지 20년이 넘었어도 카네이션을 혹시 염라대왕처럼 여길까 걱정이 되었다. 꽃잎이 몽둥이처럼 변했을 때 교사들은 얼마나 아득했으랴!
몇 년 전 오월, 꽃집 옆에 버려진 화분들을 보았다. 오래 전에 던진 듯 시들어버린 카네이션 화분이었다. 한 겨울 내내 한 몫을 바라 정성을 다 했을 꽃 집 아줌마도 시름에 젖어 보였다. ‘교권에 대한 존중이 무너져 버린 지 오래다’라는 말처럼 그의 주름진 얼굴이 더욱 애절해 보였다.
모교에서 스승의 날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었을 것이다. 1958년, 선배들은 주변학교대표들과 병중인 선생님을 방문했다. 평소 존경했던 스승의 병문안은 당연했을 것이다. 훗날 스승의 날로 번영할 줄을 짐작하지 못했을 터이다. 한 순간 추락해 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지금 그 때의 선배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시절이 다시 온다 해도 그대로 선생님을 위문하겠다고 말할 것 같다. 어쩌면 부모에 버금가는 스승이었다고 여길 것도 같다.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 선생님’ 동요처럼 가난한 시절을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선생님을 어찌 잊으랴!
교육은 송아지 코 뚫는 일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말도 회자되었었다. 모두가 사라진 옛말이 되었다. 교사는 이제 투명인간처럼 생활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교사를 함부로 하는 사회. 그 우려는 교육현장에서 진즉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학교의 봄은 정원에서 비롯되었다. 향나무며 플라타너스고목이 울울한 정원 길을 걸을 때면 소녀들 웃음이 한 옥타브 쯤 올라갔다. 분홍색 영산홍이 피면 소녀들처럼 앙증스러웠다. 쉬는 시간마다 들려오던 명곡은 얼마나 가슴을 헤집었던가. 특히 등굣길에서 ‘유머레스크’며 ‘백조’를 들을 때면 서두르던 마음도 다독여졌다. 20리 황토 이슬 배인 운동화로 교문을 들어설 즈음이면, 영락없이 ‘소녀의 기도’가 통통 튀며 반겨주었다.
피아노 선율은 언젠가 만날 멋진 왕자의 꿈으로 안내해 주었다. 어서 처녀가 되고픈 설렘도 구름을 탔다. 고독과 배고픔으로 목마른 소녀의 영혼도 ‘소녀의 기도’를 들으면 절로 행복해졌다. 그 시절 아름다운 음악이 궁핍 쯤 씻어주었던 듯싶다.
소녀들은 특히 장미정원을 좋아했다. 온갖 장미가 핀 정원에 들어서면 ‘아. 목동아’ 노래가 절로 나왔다. 꽃잎마다 비추인 찬란한 해는 ‘나 항상 오래 여기 살고픈’ 소망을 더했다. 선생님들은 소녀들 마음을 잘도 아셨는지 언제나 아름다운 명곡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매달이다시피 웅변대회에 참석했다. 교내며 지역이며 전국대회에 직업인 양 출전했다. 원고를 쓰고 외우고, 출전하는 과정은 늘 벅찼다. 그래도 후줄근한 시골뜨기에게 큰 길을 내 주신 스승님들이 감사하기 짝이 없었다. 상품으로 받아오는 재봉틀이며 전기난로며 사전은 용돈으로도 요긴했다. 수상자로 나서는 조회 시간이면 선생님들께 무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깊이 숙였다.
호국의 달 전교생에게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치라 했던 선생님, 영자신문과 백과사전을 돌리게 한 선생님, 행사마다 사회자로 내세워주신 선생님, 전학을 온 나를 살뜰히도 보살펴주신 박홍이 선생님, 얼마나 많은 분들이 어리석은 나를 깨우쳐 주셨나? 그리고 고 3때 담임인 김종선 선생님은 일생을 결정해 주셨다.
“야! 그 000 유세장 따라다닌다고 트럭 타고 목이 쉬어 다니는 게 좋아보이디? 넌 교육대학에 가!”
한 순간에 운명이 결정되었다. 000은 모교 출신인 탤런트라고 했다. 마침 내가 정치인 찬조연사로 진로를 결정하려는 참에 담임의 준엄한 말씀이 이정표가 되었다. 교사가 되기를 바라시던 아버지의 여망도 절반 쯤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지난 날 아이들과 살았던 세월은 참으로 영광이기만 하다. 그 맑은 눈망울은 어떤 회초리보다도 뜨겁고 아름다웠다. 부족한 나에게 맘껏 베푸신 내 스승님들처럼 내리 갚고도 싶었다. 교육백년지대계, 아이들과 교사와 학부모, 3위 일체가 이룰 큰 나무가 아닌가.
선생님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슴으로 보듬는 교사와 마음에 안기는 아이들.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펴지는 것 같다.
문예창작 2020년 가을호 통권 제1호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