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가면 그리고 페르소나
이 기 식(don320@naver.com)
<수필과비평 2021-6 vol.236>
옆에 있던 사람이 장난삼아 갑자기 가면을 썼을 때의 느낌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가면을 쓴 순간, 본래 얼굴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가면이 그의 얼굴이 된다. 마술을 부렸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가면, 혹은 탈은 원시시대부터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지역적으로도 오지의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신앙적인 의례나 제사에 쓰였다. 나아가 사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특권이나 횡포에 거부하는 가면극으로 발전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탈, 가면을 같은 내용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얼굴을 감추기 위하여 나무나 흙, 종이로 만든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속뜻을 감추고 거짓으로 꾸미는 얼굴 모습이나 태도를 말한다. ‘양의 탈을 썼다’라든지,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즉 외면적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자기모습이다. 사회에서 ‘선생’으로서의 나 또는 ‘학생’으로서의 나‘와 같은 외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본디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라틴어이다. 영어 ‘Person(사람)’은 ‘Persona’가 어원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기를 감추어야만 되는 모양이다. 정확히 대칭되는 단어는 아니지만, 상용화된 한자어에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 ‘僞’가 있다. ‘사람(?)’과 ‘위하다(爲)’를 합성한 것으로 ‘인위(人爲)’, ‘위선(僞善)’, ‘위장(僞裝)’에 쓰인다. 라틴어나 한자가 몇 천 년 전부터 쓰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지혜는 동서양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얼추 20세까지는 그다지 가면을 쓰고 살 일은 없다. 어른이나 선생님 앞에서의 행동거지 등은 집안 어른이나 선생님이 충분히 가르쳐주었다. 사회에 나아가면서 점차로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서서히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남의 것을 모방하기도 한다. 탈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바꿔 쓸 줄 모르면 바보 취급을 받거나 왕따를 당하가도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기껏 만든 탈이 남에게 인정 안될 때이다. 극도로 불안해지기도 한다.
30세 후반에 들면서 직장에서는 지위도 생기고, 체력도 왕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시기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니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명예욕, 금전욕을 비롯하여 많은 욕심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페르소나를 익힌다.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서커스의 조련사처럼 유연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반면에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라 여성으로부터 인기도 많아 이성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출세욕, 명예욕 때문에 비난받을 짓도 서슴지 않는다.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금전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인생의 황금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가지고 있는 탈들이 탈을 부른 셈이다.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주체적으로 살면 가면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러나 말이 그렇지 평범한 인간으로서 상식적인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나 영웅, 위인들은 달랐다. 광야나 동굴 그리고 민중 속에서, 그들은 초인적인 삶을 몸소 실천했다.
어떤 인생이었던 간에 50세 즈음에서는 인생을 정리, 축소하면서 탈을 하나씩 하나씩 벗는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페르소나가 그의 진정한 얼굴이다. 그의 인생 경험이 나이테처럼 그 얼굴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링컨 대통령이 40세가 넘어서는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한 말이 새삼스럽다. 자기의 일생을 거쳐서 만든 페르소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너세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202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