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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리샤의 퀼트    
글쓴이 : 박진희    21-06-29 00:49    조회 : 5,190

페트리샤의 퀼트
박진희
 갓 결혼한 신부로 미국 땅을 밟고 한참동안 나침반 없이 허우적거리고 헤매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어야 하는지 혼미해질 무렵, 내게 손을 내밀어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이 있었다. 교회에서 취미 활동으로 퀼트를 가르쳐주던 아름다운 금발의 페트리샤. 그녀는 신혼 시절부터 침실을 퀼트 방으로 개조해서 쓸 만큼 일찍 재봉틀과 바느질에 능했다. 수십 년간 퀼트작품을 판매하고 디자인 책도 발간하고, 많은 대회와 페스티벌에서 수많은 상을 받은 실력자였다. 페트리샤는 첫번째 유방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나를 그녀의 세계로 초대해 주었다.
 
 빅토리아풍인 페트리샤의 집은 작품으로 가득 채워진 퀼트 미술관 같았다. 거실 한 벽을 차지하는 가로 4m, 세로 3m 되는 대형 작품에 압도되고 말았다. 연한 파스텔톤의 연속적인 패턴이지만 미세하게 다른 색상으로 배치되어 조화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다이닝 룸에는 앙증맞지만 실용적인 접시받침, 부부침실과 손님방, 두 딸의 방에는 사랑스럽고 환한 침대보가, 벽에는 벽걸이가 풍경화나 정물화 이상의 독특함과 우아함을 뿜어냈다. 
 3층에 위치한 탁 트인 퀼트방은 화가의 아틀리에 그 이상이었다. 한 편엔 색색의 옷감이 켜켜이 정돈되어 있고, 사이즈별 바늘과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갖가지 스텐실과 솜들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신식 재봉틀과 다리미들, 어느 방향에서도 바느질이 가능한 커다란 나무 프레임이 벽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페트리샤는 특별한 디자인에 따라 손바느질로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재봉틀로 완성했다.
 암으로 투병하는 동안 그녀는 스테인드글라스 스타일로 커다란 창문 모양의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마치 검은색 창틀 밖으로 빨간색 꽃과 녹색 나뭇잎 사이로 낮은 산들과 강물 위의 다리가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림으로는 이차원에서 그치겠지만 정교한 디자인으로 삼차원의 시각을 페브릭으로만 표현이 가능한 도전적인 시도였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다양한 색유리로 모양을 내고 다듬어 납을 녹여 연결한다. 검은색 천이 마치 납처럼 색색의 여러가지 모형의 천조각을 이어서 일일이 감싸야 하는 공간이 백 개도 넘어 보였다. 섬세하게 처리해야 하므로 무척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워 보였다. "아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어. 작업하다 보면 아픈 줄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페트리샤는 퀼트 만드는 순서와 최소한 필요한 재료를 알려주고, 그 내용이 적힌 폴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질문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특별히 아끼는 다른 작품들도 보여주었다.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디자인이 전혀 아닌 그녀만의 특이한 기법은 수십 년 간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페트리샤의 영향으로 그렇게 퀼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단 화사한 색깔의 작은 소품으로 시작해서 은은한 색으로 큼직한 벽걸이도 만들었다. 그러다가 누가 만들어 놓은 패턴을 따라 하기보다는 개성 있는 작업이 하고 싶어졌다. 아미시 (Amish) 퀼트에서 주로 보이는 와인색과 청록색을 주로 가장자리에 프레임처럼 둘렀다. 큰 모자를 쓰고 치마를 입은 소녀가 꽃바구니를 든 그림을 확대하여 아홉개로 배치했다. 한정된 색상이기에 중복되지 않도록 색상을 최대한 그 안에서 변형했다. 그 조각들을 일일이 손으로 이어 붙여 앞면을 완성하고 중간에 퀼트 섬을. 뒷면엔 초록색 천을 대고 한 땀 한 땀 꿰맸다. 입체감을 주기 위해 꽃바구니의 꽃 자수를 놓다보니 육개월이나 걸렸다. 가로 2m. 세로 3m에 이르는 천을 모두 손으로 홈질하면서 주로 쓰이던 오른쪽 엄지와 검지는 어느덧 지문이 없어지고 딱딱한 못이 박혔다. 허리가 뻑적지근하고 눈도 침침해졌지만, 눈에 보이게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 가슴이 뛰도록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재봉틀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완전 수공이었으나 사이즈가 크다 보니 평평하게 탄력이 붙지 않았다. 그래도 완성품이라고 페트리샤에게 보여주었더니 나의 노력을 기특해하며 생각지도 않던 퀼트쇼에 출전시켜 주었다. 전 세계 퀼트인들의 작품이 삼일에 걸쳐 전시된 이 대회에서 페트리샤는 그때 작업하고 있던 스테인드글라스 출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놀라운 색상, 정교함, 상상밖의 이미지,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Crazy Quilt까지 대단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고 아름답던지 황홀 지경이었다. 그중에 나의 것은 주눅이 들어 더 늘어져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용기를 주고 문하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페트리샤의 유방암이 재발되었다는 소식을 그녀가 다른 도시로 이사하고 한참 뒤에 듣게 되었다. 두 번째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남편과 킬로만자로 등반을 떠났단다. 지금쯤 그녀는 어디에서 어떤 퀼트를 만들고 있을까. "행복과 고통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의 재료가 되어, 마침내 무늬가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된다."는 영화 <아메리칸 퀼트>의 대사가 늘 생생하다. '암'이 주는 두려움에도 당당하고 세상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그녀만의 창의성, 정열과 영혼이 깃든 최고 예술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각보가 이어져 독특한 작품이 완성된다. 퀼트는 어쩌면 우리네 인생, 그리고 이 세상의 완벽한 메타포가 아닐까. 어떤 색상의 어떤 무늬를 이어 나갈 것인지, 서툰 바느질의 연속이었던 삼십대와 사십대 즈음이었다. 극도로 혼란스럽던 그 시절, 페트리샤의 퀼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오늘도 완성품을 기대하며 나름의 무늬를 만들어 어제와 내일의 조각을 이어간다.

<2021년 6월 25일,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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