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차성기
추위가 한결 느슨해진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아내와 안양천변 산책길에 나섰다. 여느 때보다 한산했지만 성탄절에 이은 연휴라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거리두기 강화로 연말모임은 취소하고 5인 이상 모임을 금지한 탓에 외출도 꺼리다 보니 모두 답답한 마음에 나선 듯하다.
오랜 친구들도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누구 한 사람 볼멘소리를 내지 못한다. 여느 때면 술잔을 기울이는 김에 호기를 드러내어 일가견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이번 연말연시 모임은 건너자는 고민 끝에 나온 제의에 순순히 응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느닷없는 내습에 놀랐는지 그보다는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에게만은 폐를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동의이겠다.
안양천변 고수부지 위 산책로에 일렬로 선 벚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다가올 새봄을 고대하듯 소슬바람에 맨몸을 흔든다. 트래킹 보도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는 걷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변함없이 반긴다. 지난여름 홍수에 허리 높이까지 흙탕물을 안고서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이 안쓰럽다.
위를 보니 꼭대기 가지 사이로 둥지 두 개가 나란히 앉았다. 가까이 그리고 같은 높이인 걸 보니 사이좋은 이웃인가보다. 한편 길옆 도토리 키 재기 하듯 늘어서 있는 사철나무 머리 높이 위로는 아직 푸름이 남아있다. ‘나 안 죽었소’ 하는 듯 건재함을 과시하며 지나는 이들의 하얀 마스크와 대비된다.
모두 어떻게 지나는지. 숨죽이듯 조용하다 보니 하염없는 무소식에 보고 싶은 얼굴들이 궁금해진다. 조각난 지난 한 해 모습이 모락모락 저편에서 뭉게구름처럼 다가온다. 글벗과 자작 글을 나누다가 해 질 녘 한 잔 술에 마음을 모으던 때가 아득한 옛날 같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도란도란 살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립다. 한겨울이 가면 어김없는 봄이 다시 오듯이 가슴 따스한 그 날이 오겠지.
파드득 새소리가 요란하다. 야트막한 관목 위로 넝쿨이 무성한 가운데 안쪽으로 둥지 모양 그늘 속으로 참새들이 드나든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붉은 열매, 어두운 둥지, 늘어진 갈댓잎이 바람에 일렁이며 아늑한 서식처를 마련해준다. 큰 참새, 작은 참새가 친구인 듯 가족인 듯 모여 신나게 떠드는데 부럽다. 덩치 큰 까치도 요란스레 날아들고 저 건너 고요히 흐르는 안양천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 위로 한 무리 청둥오리가 한가로이 노닌다. 가까이 다가간 다리 아래엔 팔뚝만 한 물고기가 떼를 지어 오른다. 건너편에 왜가리와 가마우지 눈초리가 매서운 걸 아는지 모르는지.
초고층 빌딩 거리 한 뼘 건너 무심히 흐르는 도심 하천 주위에도 수많은 생명이 함께하고 있다니 놀랍다. 멀리 수변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소리 뒤로 자연생태계는 저 혼자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본다. 함께 하는 삶이 아름다움을 알려주듯. 외로운 삶보다 동행하는 삶이 오래간다고 했던가.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삶이냐 살가운 이웃과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우리네 인생살이에 어울리겠다.
이렇듯 당연한 일상이 흐트러지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얼굴 보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면문화에 익숙한 우리네 일상이 불현듯 하룻밤 사이에 만나기 꺼려지고 얼굴에 복면을 낀 채 살아가야 한다니. 이젠 많은 사람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지 벌써 일 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너도나도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 짐짓 위로하며 지나왔건만. 언제까지 갈는지, 아예 인플루엔자 독감같이 고질병이 될 수도 있다니 생각하기 싫어도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변함없는 우리네 일상도 크게 보면 커다란 변화의 한가운데 있음을 느낀다.
비대면에 적응하는 데는 온라인사회관계망 등 눈부신 정보통신 혁명의 혜택에 힘입은 덕도 있다. 원격 온라인 대화가 어느덧 우리네 일상에서 스펀지에 물 스미듯 불편을 대체하고 있다. 덕분에 지난가을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사무실도 홈오피스로 재정비하고 외부 회의는 영상모임으로 진행하고 있어 완벽하진 않아도 순응해가는 나 자신이 놀랍기도 하다.
수년 전부터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생활과학 강연을 통해 실내공기 질의 중요성을 주장해왔다. 초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하늘을 보며 대안으로 마스크 쓰기를 강조하고 한 장씩 나누어주며 올바른 착용법을 안내하던 나로선 그다지 낯설지도 않다. 오히려 이즈음의 상황을 책 내기와 글쓰기에 전념할 기회로 받아들여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글 쓰려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문제는 글감이다. 더불어 부대끼며 사는 생활에서 그런대로 글감을 찾겠건만 비대면의 평범한 삶에서 감동을 어찌 담아낼 것인가 또 하나의 숙제다.
늦은 오후 산책로 푸르던 하늘에 조금씩 노을이 깔린다. 해는 한낮에 사람들의 목덜미를 따사하게 비춰주고 참새 보금자리를 데워주더니 오늘 할 일을 다 했는지 수굿하다. 늘어진 붉은 볕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마를 따사로이 감싸준다. 건널목에 줄지어 선 하나같이 표정 없는 얼굴들. 하얀 마스크의 동시 패션 속에 가려 안 보일 뿐이겠지. 캐럴 소리는 사라지고 자동차 소음만 요란한 저녁거리, 웃음 잃은 연말이 도심에 덮치듯 내린다. 붉은 노을이 등 뒤를 감싸 안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