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산과 등산화
김단영
모처럼 오더가 없어서 하루 쉬는 날이었다. 남편이 선심이라도 쓰듯 등산을 가자고했다. 단번에 오케이. 예전에는 남편이 산에 가자고 하면 번번이 내가 싫다고 거절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은 바뀌는 모양이다. 최근에는 내가 먼저 등산가자 졸라대지만, 남편은 지인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함께 등산할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이번에 퇴짜를 놓는다면 다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 열일을 제쳐두고 나선 걸음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보다 일찍 일어났다. 신발장 위 칸에서 등산화를 꺼내 신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읍내 가게로 쪼르르 달려가 김밥 세 줄을 사왔다. 생수도 한 병씩 챙기고, 믹스커피와 끓인 물도 보온병에 챙겨 넣었다. 오랜만에 함께 나서는 걸음이라, 날씨도 화창하고 기분도 좋았다. 산행계획은 남편이 세웠다.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 볼거리도 좀 있으면 좋겠고,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야 한다는 주문을 넣었더니 밀양 구만산을 선택했다.
평일이라 너른 공터에 주차를 하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 조금 걸었다. 산입에 들어서니 등산로 안내도가 있었다. 안내도를 보면서 산정까지는 무리일 것 같고, 구만산 폭포까지만 다녀오는 걸로 남편과 합의했다. 거리는 3킬로미터, 폭포까지 왕복이면 6킬로미터였다. 무슨 자신감인지 그 정도라면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지와 산지의 걷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나뭇가지에는 각종 산악회 꼬리표가 즐비하게 매달려 있었다. 수많은 등산객이 찾아온 산이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우리는 구만산 산행이 처음이었고, 나보다는 잘 걷는 편이지만 남편 또한 등산전문가는 아니었다. 등산로에 접어들면서 신고 있던 등산화를 내려다보니 새삼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사준 것인데 족히 20년은 지난 신발이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6년 만에 시댁으로 살림을 합쳤다. 그 해에 남편이 등산화 두 켤레를 사왔을 때 크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변명을 하자면 시부모님은 팔순의 고령이었고, 연년생 남매는 유치원에 다녔다. 그때도 남편과 자영업을 하던 시절이라 먹고살기에 몹시 바빴다. 남편의 기분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쓸데없이 비싼 신발을 사왔다며 짜증을 부렸다. 이제 와서야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몇 번 신지 않아서인지, 신문지로 안팎을 싸서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등산화가 너무 말짱했다.
“여보, 고마워요. 역시 비싼 신발이라 질긴가봐. 그치요?”
구만산은 바위가 많았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써 폭포에 도착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구만산 계곡이었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폭넓은 계곡을 관통하여 데크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잠시 땀을 식힌 후, 다시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웠다. 남편은 저만치 앞장서서 걸었다. 시골태생이라 산을 잘 타는 편이었다. 나란히 함께 걸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사회적 거리를 두기라도 하듯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산에는 오직 남편과 나, 두 사람만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마스크도 벗었다. 구만산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이정표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산길이 험해졌다. 산꼭대기에서부터 와르르 흘러내리는 낙석이 가득한 구간도 서너 차례나 마주쳤다. 큰물이 지면 개울 길은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등산로가 사라져서 개울을 이리저리 건너갔다 건너오길 반복했다.
남편은 부지런히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나는 그저 따르기만 했다. 남편의 뒷모습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등에 짊어진 배낭 안에는 김밥이 들어있었다. 일용할 양식을 따라, 남편의 뒷모습만 좇으며 산을 오른 셈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질 무렵 폭포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힘들게 산을 오른 보람이 있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직으로 낙하하는 물줄기는 시원하다 못해 오싹함을 끼쳐주었다.
웅장한 폭포소리에 새 힘이 솟아올랐다. 내친김에 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망이 좋은 중턱에 올라 김밥을 먹기로 했다. 가파른 산중턱까지 오르니 골짜기가 깊이 내려다보였다. 구만산 이름은 임진왜란 때 지어졌다고 한다. 구만 명이나 이 산으로 피신하여 전란의 화를 피했기에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구만산을 발아래 두고 인증사진을 찍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멀쩡하던 등산화가 밑창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것이 아닌가. 28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남편이 업어줄리 만무하고 맨발의 투혼으로 하산해야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김밥 세 줄을 맛있게 까먹었다. 뜨거운 커피도 한 잔씩 마시고 내려갈 채비를 했다. 남편은 어느새 또 저만치 내려가 서 있었다. 함께 가주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혼자 가는 길은 아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지점에서 우두커니 기다려주고 있었음이다. 인생길에서도 늘 남편이 앞장서 걸어가다 때때로 기다려주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무사히 하산했다. 신발 밑창이 걱정되어 더 조심조심 걸었다. 갑피는 멀쩡한데, 밑창이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고무 밑창보다도 중간창이 스펀지처럼 삭아서 떨어져나갔다. 시간에 바스러진 가루를 보면서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가 떠올랐다.
신혼 첫날밤에 신랑이 오해해서 신부를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다.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신부네 집을 지나가게 되었고 신부가 궁금하여 문을 열어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았다는 내용이었다.
내 등산화도 다시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20년이 넘도록 산행 갈 날만 기다리며 신발장 안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몇 번 꺼내 신기는 했으나 아버님 돌아가시고는 처음이었다. 적어도 9년 동안은 한 번도 신지 않았다. 남편이 사준 신발이기도 하고, 갑피가 하도 멀쩡해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등산화 수선하는 곳을 검색해서 문의했더니 밑창 갈아주는 비용이 그 옛날 신발값이랑 맞먹었다. 남편은 당장 버리고 새로 하나 사라며 통박을 준다.
버릴까 고쳐 신을까 선택하기 힘든 고민이 생겼다. 신발도 자주 신고 다녀야 한다. 쓰지 않는다고 영원히 새것일 수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냥 내버려둔다고 관계가 원만히 유지되지 않는다. 자주 꺼내보고 점검해보아야 어느 날 갑자기 밑창이 떨어져 나가는 낭패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끝)
-한국산문 2021년 7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