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를 찾아줘
“코가 어디 붙어있어? 숨은 쉴 수 있는 거야? 코가 왜 그렇게 작아? 대체 어디로 숨 쉬는 거야? 안경은 어디에 걸쳤어? 거참 신기하네.”
수년 전 어느 모임에서 한 여성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그 말 때문에 몇 날 몇 달 동안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몇 해를 두고 코가 어디 붙었어? 코가, 코가, 코가, 그놈의 “코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소리가 정신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코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코를 찾아 헤맬 것만 같았다.
2019년 12월 이후, 모든 농담과 해학과 풍자가 코비드(COVID)-19에 묻혀 사라졌다. 코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눈에 띄지 않는 저 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이 뒤죽박죽, 내 삶도 곤죽이 되고 말았다. 대중은 트롯(trot)에 열광하고 개그맨들은 더 이상 웃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미각을 잃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냄새를 잊었다 한다. 어떤 이들에겐 밥상의 대화가, 어떤 이들에겐 찻잔의 온정이 사그라들었다. 가장의 어깨에서 평안함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점하신 동네 어르신은 마스크 끼고 일하는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스크를 하고 있으니 고운 얼굴 보기 힘들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니 다 예뻐 보여.”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마스크를 끼니 예전의 생김새를 통찰하기 어렵고, 웬만해서 상대방의 윤곽을 읽어낼 수도, 속내를 파악할 수도, 약점을 꼬집을 수도 없다. 그가 도량 깊은 인물인지 미지근한 속물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감정을 단정 짓기 애매하다. 바이러스가 폭죽처럼 터지는 시대, 의로운 정치인을 찾기 힘들고 진솔한 삶을 탐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마스크를 쓰니 다 아름다워 보인다는 새로운 인식에 저항하진 못할 성싶다.
오늘은 2020년 시월의 마지막 날.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한 뒤, 일 년 가까이 마스크를 낀 채 살아가고 있다. 안경과 마스크가 만나는 지점까지만 한정적으로 하는 화장기술도 터득하게 되었다. 파운데이션은 굳어버리고 립스틱은 말라비틀어졌다. 바이러스는 코뿐만 아니라 한 조각 웃음기마저 먹어치워 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이 코가 사라지는 걸 어찌해야 할까. 가라앉은 콧등과 튀어나온 입술을 감추고 눈빛만으로 일하니 박수라도 쳐야 하나. 비밀스러운 언어일랑 입마개 속에 꼭꼭 숨겼으니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고 추억의 유행가라도 불러야 하는지.
하루 한 번 마스크를 떼어 던지고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작은 코는 더욱 납작해지고 웃지 않는 입은 심하게 도드라져있다. 내가 숨쉬기 힘들었던 게 마스크 탓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의 코는 가출한 것도 출가한 것도 아닌, 부직포에 푹 파묻혀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므로 못내 허망할 따름이다. “네 코에 대해 말해줄까?” 하던 여인의 목소리가 비로소 들리는 듯하다.
이것은 대화의 감옥인가, 열쇠 없는 정조대인가. 인터넷에 ‘코’라는 단어 한 글자만 입력해도 코로나가 1순위로 떠오른다. 코가 더 이상 얼굴의 중심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코를 만지기도 떠름한 세상. 여인의 입심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 시대에 살고 있다. 정제하지 않은 그녀의 개그(Gag)가 그리울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이야. 코와 입술을 지운 반쪽짜리 얼굴에 익숙해져야 한다니. 마스크와 언어의 힘이 크게 다르지 않건만.
이 모든 현실이 한바탕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입에 올리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버거운, 코만 둥둥 떠다니는 위정자들의 콧대만큼이나 교활하고 간사한 단어 코비드. 그러나 ‘그 덕에’ 내 코가 원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무심코 이렇게 외친다.
“이런, 코로나-19 같으니라고!”
-2020《군포시민문학》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