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고
윤기정
‘클라고’는 ‘크려고’의 외할머니 식 발음이다. ‘클라고 그런다’는 말은 아플 때나 어머니에게 꾸중 들을 때면 어김없이 듣던 말이다. 나나 동생들이 아플 때면 이마를 짚고 하던 말씀인데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큰다’는 말이 까닭 없이 좋았다. 잘게 찢은 장조림 고기를 쌀죽에 얹어주는 호강을 누릴 때면 자꾸 크고 싶었다.
‘클라고’는 꾸중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어머니는 가만 좀 계셔요. 애들 버릇 나빠져요.” 할 때쯤이면 무릎을 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한번은 동생 하나가 까치발로 베개를 딛고 서서 아버지 양복 웃옷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다 들켰다.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을 때 할머니의 ’클라고‘가 들렸다. 잠시 후 어머니의 웃음보가 터졌다. 나도 키득거렸다. “크면 베개 없어도 되는데”라는 내 말에 할머니도 웃고 동생도 따라 웃었다. 그 ‘클라고’가 평생 힘이 되는 한 마디가 될 줄을 그때는 몰랐다.
나에게는 외삼촌이 없다. 외할머니는 막내 사위와 함께 산 거였는데 그런 형편을 안 것은 좀 더 큰 뒤였다. 어쨌든 우리 형제에게는 그냥 할머니였다. 아버지가 파월 기술자로 갔다가 영정 사진 앞세운 작은 상자로 돌아오고 나서 방황이 시작됐다. 아버지의 부재와 블록 벽에 슬레트 몇 장 얹은 변소 없는 무허가 단칸방과 끼니마저 간데없는 가난은 고등학생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끝없이 엇나가고 있었다. 가난보다 부끄러운 맏이가 되고 있었다.
깜깜한 부엌, 부뚜막에 앉아서 어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한 개비를 받아서 엉거주춤 선 채 나도 담배를 피웠다. 장남을 앞에 둔 어머니의 긴 한숨만 이어지고, 나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클라고 그러니라.” 할머니가 나가면서 던진 말씀이다. 할머니 동네 친구가 우리의 딱한 신세를 알고 당신의 단칸방에 할머니의 잠자리를 내어 주어서 밤이면 그리로 걸음 했다.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끌 때 가슴에 조그만 불 하나가 켜졌다. ‘그래. 커 보자.’
살면서 겪어내야 할 고비마다 그 말씀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더 클 일이 없지만 ‘클라고’만 떠올리면 신이 난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마음의 지팡이가 된 말이 많지만 ‘클라고’가 으뜸이다. 이제는 사라진 옛 가족의 얼굴들, 어느 밤의 둥그런 촛불, 바람벽에 흔들리던 그림자, 60촉 전등을 꺼도 이불 속에서 이어지던 우리 4형제의 키득거림과 소곤거림, “어이들 자라. 잘 자야 크지.” 윗목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 끝에 해병대산을 넘어온 밤기차 기적 소리 들으면서 잠들던 기억들, 행복한 장면들은 그 말에 모두 들어있음이라.
손주 남매가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서로 제 것이라고 다투다가 끝내 싸움이 커진다. 애들 아비 어미가 나서기 전에 한쪽 팔에 하나씩 나눠 안으면서 아들, 며느리 말막음한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불현듯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멀어져 간다. 많이 컸다 하셨을까?
2121. 11 <한국산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