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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구경 와!    
글쓴이 : 박병률    22-03-18 17:58    조회 : 3,909

                                                 집 구경 와!

 

  그린벨트가 영 안 풀리네, 날씨가 추워지려나!”

  황 노인이 설렁탕집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밖에는 찬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황 노인은 배드민턴 동호회 회장인데, 오늘따라 수염이 덥수룩하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내가 뒤따라가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회장님, 옛말에 이웃집 색시 믿고 장가 못 든다는 말이 있는데, 언제까지 땅 타령만 하실 거요?”

  황 노인은 땅이 풀리면 전원주택을 짓고 노년을 편히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금 사는 집이 방 두 개 딸린 오래된 주택이라 화장실이 밖에 있다. 황 노인 부부가 2층에서 살고 아래층은 세를 주었다. 황 노인이 그린벨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회장님,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불편하지 않으세요?”

  “50 년을 살아서 그런지 불편한 지 몰라.”

  “베란다에 화장실 겸 욕실을 만들면 좋겠네요, 배관은 작은방 한쪽으로 지나가면 되니까 방을 조금만 깨면 되고 돈도 많이 안 들어요.”

  황 노인은 불편하지 않다고 했지만, 내가 실내장식 가게를 운영하는 까닭에 화장실이 밖에 있는 게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내가 설명을 하자 황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영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한테 화장실 만들자고 했더니 그냥 쓰지 헌 집에 돈을 들이느냐고못마땅한 눈치였소.”

  “회장님은 아드님 하나뿐이잖아요?”

  “아들 하나지, 큰 손자가 고등학교 다니고 둘째 놈이 중학교에 다녀.”

  “땅이라도 팔아서 아파트로 이사 가요. 노후에 편하게 사셔야죠.”

  “지금 팔면 똥값이라,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린벨트가 언제 풀리느냐고 물어봤소. 점치는 사람이 당신 때는 땅이 안 풀리고 아들 좋은 일 시키겠구먼합디다.”

  황 노인이 말끝을 흐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밖으로 쏠렸다. 식사하는 동안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변했다. 식당 앞에는 젊은 남녀가 양쪽에 서서 어린아이 팔을 잡고 눈 속을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걷다가 뛰기도 하고 어른 손에 매달려 미끄럼을 탔다. 잠시 후 내가 말을 이었다.

  “아드님이 멀리 떨어져 사니까 부모가 불편한 줄 모르지요. 아드님은 학교 다닐 때 1등을 놓치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공부 잘했지. 손자 얼굴 본 지도 오래됐어. 아들이 연구소에 다니는데 일이 바쁜가 봐! 제 식구 잘 사면 그만이지 뭐.”

  황 노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황 노인은 그리움을 달래려고 그린벨트로 묶인 땅을 일구어 가며 농사를 짓는 모양이다. 해마다 배추, , 고추, 감자, 토마토를 심어가며 농작물을 가꾸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황 노인은 힘에 부치는지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빠진 지가 오래됐다. 한동안 서로 안부조차도 모르고 지냈는데 어느 날 황 노인한테 전화가 왔다.

  “박 사장, 우리 집 화장실 좀 만들어 줘요. 나이를 먹으니까 오줌이 자주 마려워. 겨울에 화장실 가는 게 춥고 귀찮아서 요강을 사용해.”

  황 노인과 동호에서 만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연세가 80 중반이 되었다. 모임 때면 황 노인은 박사 아들 두었다고자랑이 늘어졌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술 한 잔 들어가면 품 안의 자식이지 결혼하면 남이나 마찬가지여!”라고 푸념했다. 그러면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땅을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다니.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작품 속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이 겪는 고통의 이유도 모르고,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렸다. 하지만 고도는 막을 내릴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2, 블라디미르의 대사가 슬픈 여운으로 내 가슴속에 남았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나는 인간의 삶 속에서 고도를 찾았다. 삶이란, 자신이 원하고 상상하는 것을 이루려고 찾아가는 긴 여정이 아닐까? 그래서 황 노인은 영국에 사는 아들과 나한테까지 화장실을 만들자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아들은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시큰둥했지만, 나는 황 노인 전화를 받고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회장님, 저는 가게를 그만둔 지 오래됐어요. 대신 일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 줄게요.”

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뒤 공사 업자를 수소문했다. 황 노인한테 일할 사람을 소개해 주고 한 달쯤 지났을까, 황 노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 사장, 덕분에 일 잘 마쳤어. 집안에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하기도 좋고 완전히 딴 세상이야, 집 구경 와!”

                                                   리더스에세이 2022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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