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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가지 신랑( 동인지 『목요일 오후 』6호)    
글쓴이 : 김주선    22-06-19 12:44    조회 : 15,907

싸가지 신랑 

김 주 선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꿀잠을 잤다. 잠결에 홑껍데기 이불을 끌어다 덮을 정도로 제법 선선했다. 주말인데도 남편은 출장을 가는지 새벽부터 커피 텀블러에 얼음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요깃거리라도 챙겨줄까 하다가 모르는 척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맞벌이 부부고 그이가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로 티스푼 젓는 동작 하나도 살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싸가지 신랑이라고 휴대전화에 저장한 지도 십 오륙 년이 넘었다. 그 사람 휴대전화에 나는 집사람으로 뜨는데 말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를 대신 받아주던 직원이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놀라길래 그날 하트 세 개를 뒤에 보너스로 달아주었다.

싸가지의 유래는 이러하다. 이사도 했겠다 남편도 소개할 겸 친구 두 명을 집으로 초대하게 되었다. 평소 고기 쌈을 싸면 집사람 입에 먼저 넣어주던 사람이, 어라? 쌈을 자기 입에 넣기 바빴다. 손님 치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가 쌈 하나 싸서 와이프 입에 좀 넣어주세요.”라며 눈치를 주었다. 남편은 마지못해 내 입에 상추쌈을 구겨 넣어 주었다. 둘이 있을 때와 여럿이 있을 때 남편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친구를 초대해 자랑질 좀 하려고 했는데 남편 흉잡히는 꼴이 된 셈이었다. 남편은 시쳇말로 츤데레’(인정머리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성격의 캐릭터)였다. 투덜거리긴 해도 성격이 모난 사람은 아닌데 내 친구들 앞에서 지나치게 퉁명스럽게 굴었다.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면 좋으련만, 오해하기 딱 좋았다. 돌아간 친구들이 소문내기를 싹수머리가 없는 남동생 같더란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싸가지 신랑이었다.

신혼 시절엔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애교 없고 무심하기로 치면 나 또한 만만찮다. 나는 연애할 때 남자에게 이벤트를 부탁하거나 특히 내 생일날 케이크에 초를 꽂아놓고 생일 축가를 끝까지 불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상황을 못 견뎠다. “선물 줬다 치고! 촛불 켰다 치고! 노래했다 치고!” 나의 이런 무례한 쓰리고 외침에 사람들은 대체 뭔 트라우마가 있었느냐고 묻곤 했다그런데 이 사람도 그랬다. 가족들이 잊지 않고 생일을 챙겨주고 케이크에 초를 꽂을라치면 어김없이 손사래를 치며 케이크 절단식부터 먼저 해버려 식구들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오글거려 미칠 노릇이었나 보다어디 생일뿐이겠는가. 몇 번 안 되는 기념일도 이런 식으로 초 치는 바람에 지금은 기념일이고 뭐고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다. 이런 점은 안 닮았으면 좋겠는데 나와 어쩜 그리 취향이 똑같은지, 남들이 보면 남매로 안다. 그래서 결혼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니 둘 다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익숙하지 않은 대접이 쑥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같이 살며 사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심한 듯하면서도 잘 챙겨주는 그의 캐릭터를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지난번 전주에 갔을 때 일이다. 문학상 시상식이 끝나고 갈비탕집엘 갔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노인 한 분이 우리 부부를 흘끔 보더니 한 말씀 하셨다. 남편은 이과 계통의 직업을 가졌을 거라며 하는 일의 통이 클 것이라 했다. 고기 발라내는 가위질 보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가만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날 보고는 문과 계열의 일을 할 거라나. 순간, 점쟁이인가 관상쟁이인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남편이 물었다. “제 얼굴에 직업이 쓰여 있어요?” 설마 얼굴에 직업이 쓰여 있을까. 노인의 연륜과 삶의 경험으로 미루어 몸짓, 손짓, 말투 하나하나를 보면 그 정도의 유추는 가능하지 않을까.

노인이 말하길 남편은 아내를 떠받들고 사는 관상을 타고났으며 남편의 턱 밑에 복이 붙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복이 있는 게 아니고 나한테 복이 있는 게 아닐까. 추가 반찬은 셀프이다 보니 떨어진 반찬을 채우느라 남편이 몇 번을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내가 먹기 좋게 고기를 발라 뚝배기에 놓는 것을 노인이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노인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빈 깍두기 접시까지 채워 드렸으니 인사치레로 덕담을 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노인이 남편에게 명함을 건네길래 슬쩍 엿보니 현대자연연구학회에서 풍수지리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면 사람의 속도 보이느냐고 신기하다며 추켜드렸다. 땅에도 경락과 맥이 있어 사람과 같다며 남편의 손 모양새를 보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처자식 굶겨 죽일 손은 아니란다. 내 손은 길쭉길쭉하니 게으른 손으로 보였을 테지.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어서 무심히 흘려들었다. 내가 문과 계열의 일을 할 것이라는 노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취미 삼아 문학을 공부하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니 자연스럽게 나에게서 문학의 향기가 새어 나왔을 뿐, 난 여전히 수리(數理)에 밝은 봉급쟁이일 뿐이다. 손재주도 있을 거라는데 글 쓰는 일도 손재주에 속하나 싶어 속으로 웃었다. 남편이 연상 아내를 경로 우대하는 티가 너무 났었는지 아무튼, 노인의 말에 기분은 좋았다. 이 남자가 평생 내 수발을 들어준다니 말이다. 늙고 병들어 봐야 알 일이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남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집안 사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난 남자였다. 손아래로 여동생이 둘 더 있었다. 형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대학 졸업도 불가능했을 터라 그에게는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의 넥타이 줄에 목매달고 사는 식구가 늘어나자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을 부리며 험한 일을 한다는 게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갈 적마다 남편은 여행비만 대주고 고소공포증을 핑계로 일만 했다. 스키장 리프트도 못 타길래 정말인 줄 알았다. 그에게 공포를 안기는 건 비행기가 아니라 회사나 가족들을 먹여 살릴 통장 잔고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오늘이 입추고 글피면 말복인데 복달임으로 삼계탕을 끓여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중복 때는 복날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 말복만큼은 달력에 표시해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땡볕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 소라도 잡고 싶지만, 가스 불 앞에서 푹푹 고아 댈 생각을 하니 벌써 진이 빠진다. 남편은 분명 나가서 사 먹자고 할 테지만 말이다.

비록 꽃다발은 주지 않을지라도 기념일에 신문지로 둘둘 만 뭉칫돈을 던져주며 밤새 돈을 세는 재미만 준다면야, 왕싸가지인들 어떠하랴. 그런 남편의 성실함이야말로 내 얼굴의 주름을 쫙 펴주는 명약이 아닐까.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애정을 감추기 위해 혹은 솔직하지 못해서 겉으로 쌀쌀맞게 행동한다는 츤데레 같은 남자지만, 내 휴대전화 속 싸가지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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