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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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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거지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9:10    조회 : 6,097
 
                                                       설 거 지        
                                                                                                                노 문 정 (본명:노정애)

 ‘취미’란을 써야 할 때면 늘 긴장하기 일쑤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음악 감상, 요리, 꽃꽂이 등 잠깐씩 접하기는 했지만 재미를 붙이진 못했다. 여전히 고상한 취미와는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이것도 취미의 종류에 넣을 수 있다면 나의 유일한 취미는 설거지하기이다.  
 어려서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설거지를 도와드리곤 했었다. 조금씩 남긴 밥이나 반찬들을 설거지 그릇과 함께 들고 뒤꼍의 우물가로 가면 목을 타조처럼 빼고 기다리던 닭과 오리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왔다. 옹기종기 모여서 밥을 먹는 닭과 오리를 보면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구경꺼리라 설거지가 놀이처럼 즐거웠다. 손대지 않은 새 밥을 그릇째 갖다 주어 할아버지께 혼이 나기도 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요령껏 밥과 반찬을 남겨 그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2월이었다. 사업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정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온갖 기계장치를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멀리서 온 딸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하룻밤사이에 10년을 늙어버리신 어머니를 두고 서울행 첫차를 탔었다.  추위가 마음에서 오는지 두툼하게 입은 겨울 외투도 내 몸 구석구석과 심장까지 파고드는 시린 바람을 막아주지 못했다.
 집에 들어서자 내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작은 아이가 “외할아버지 죽었어?”하며 두 눈 가득 눈물을 담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그날 아이들에게 이른 저녁상을 차려주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달그락거리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싱크대 앞에서 두 아이가 붙어 한창 설거지 중이었다. 키 작은 둘째는 의자까지 받히고 섰다. 커다란 고무장갑을 끼고 긴 치마가 되어버린 앞치마도 둘렀다. 주위는 온통 물바다였다. 연신 조용히 하라며 팔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동생을 달래는 큰아이의 뒷모습이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외손녀들 걱정하시는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따뜻한 밥 한 끼 못 사드리고 왔었다. 정작 딸 노릇 못한 나는 아이들에게 일을 미뤄두고 잠에 취해 있었다.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생각나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를 위해 설거지 선물을 했던 딸들은 이제 고2, 중3이 되었다. 요즘은 용돈이 궁해져야 설거지를 한다. 한 번에 천원이라는 돈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칭찬도 듣고 돈까지 생기니 일석이조라며 떠들지만 제 주머니가 두둑하면 웬만해서는 싱크대 앞에 서지 않는다. 아직은 설거지의 묘미를 터득하지 못했음이리라. 
 1년여의 병원생활 후 아버지는 퇴원하셨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계시면서도 곧잘 농담을 던져 우리들을 웃기곤 하셨다. 웃음만은 잃지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가끔 아이들과 함께 친정나들이 하면 반가워하며 반쪽의 웃는 얼굴을 하시는 아버지. 그러나 그 얼굴을 보면 속상했다. 힘든 어머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설거지뿐이었다. 친정에 놀러온 딸에게 일시키는 못난 어미라며 자책하시는 어머니께 마음과는 반대로 짜증을 부렸다. 설거지는 표정도 숨겨주고 눈물도 푸념도 물소리가 감추어주어 좋은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면서 빌었었다. 그릇의 더러운 것 씻겨나가듯 아버지의 병도 깨끗이 낳아지기를, 훌훌 털고 일어나 예전의 호령하던 모습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설거지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뭔가를 빌게 되었다. 정신없이 직장으로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고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가족 모두가 좋은 하루를 잘 보내게 해 달라는 바램을, 온 가족이 함께한 저녁에는 무탈한 하루의 감사함을, 잔잔한 걱정거리들이 머리를 무겁게 하면 말쑥해진 그릇처럼 내 머릿속도 맑아졌으면 해서 더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낀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하루를 마감하는 이 순간 내 마음속의 찌꺼기들도 씻겨나가길 바라며 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덕분에 설거지는 더 즐거워졌다.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지만 8년을 우리 곁에 계시다가 몇 해 전 떠나셨다. 얼마 전 친정어머니가 놀러오셨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가 더 그립다고 하신다. 그 시절 내가 했던 것처럼 설거지를 해 주시겠다며 싱크대 앞에 서신다. 난 뒤에서 어머니를 가만히 안아드렸다. 나도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낮게 말했다.  
 난 설거지가 즐겁다. 이것만은 잘 한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초대 받아서 가는 집에서 취미생활을 즐기게 해달라며 싱크대 앞에 선다. 내 손길이 닿아 말끔히 정돈된 부엌을 보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은 기계가 대신해 주기도 하지만 이 기분까지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에게 설거지는 감사와 반성의 기도요 고해성사이며 나를 위한 세련(洗練)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세이 플러스>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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